top of page

​테디베어 메르헨

펠리카

옛날 아주 먼 옛날, 테디베어를 모아 전시하는 박물관이 있었습니다.

그 박물관은 넓고도 거대한 건물에 온 세계의 테디베어를 모아놓은 곳이었습니다. 크기도 재료도 제각각, 하지만 모두 귀엽고 사랑스러운 테디베어들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관람객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온곳에서 반겨주었습니다. 테디베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박물관에 방문했습니다. 박물관의 모든 테디베어는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 수많은 인형 중에서도 제일 사랑받는 특대 봉제인형이 있었습니다. 다른 인형처럼 푹신푹신하고 부드럽지는 않았지만,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그 봉제인형은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너무나 인기가 많은 그 봉제인형은 특별하게도 다른 인형들과 떨어진 곳에서 함부로 다가올 수 없도록 줄까지 두른 전시대에 놓여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한 번 보면 꼭 갖고 싶어할 정도로 멋진 봉제인형이었습니다.

해가 떨어지고 밤이 찾아오면 박물관의 문이 닫힙니다. 관람객들이 돌아가면 테디베어들은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화제로 와르르 수다를 떨었습니다. 오늘 한 꼬마는 나를 집까지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어, 어떤 마니아는 오직 나를 보려고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그랬어. 그들은 주로 사람들에게 얼마나 사랑받았는가에 대해 자랑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특대 봉제인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리 너머로만 사람들을 보고, 가만히 앉아서 사랑받기만 하는 일이 싫었습니다. 왜 사랑받는 게 싫다는 거야? 다른 테디베어들은 이상하다는 듯 물었습니다. 봉제인형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테디베어들이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해가 뜨고 아침이 찾아오면 박물관의 문이 열립니다. 관람객들이 들어오면 테디베어는 조용히 앉아 저마다 모습을 뽐냈습니다. 사람들은 특대 봉제인형 앞에 모여 하나같이 감탄했습니다. 그 무리 속에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빤히 봉제인형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것이 싫은가여?

인형은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인형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형이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하지만 저 소녀는 봉제인형을 바라보며 말을 걸어주었습니다. 봉제인형은 속으로 난생 처음 사람이 말을 걸어준 일에 적잖게 놀랐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보고 있을 때는 움직일 수 없다는 인형들만의 규칙 때문에 봉제인형은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곳을 나가고 싶은가여? 소녀는 덧붙였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다르다는 걸 눈치챈 거야? 그렇지만 어떻게? 봉제인형은 생각했습니다. 소녀에게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인형이라는 이유로 사람인 소녀에게는 어떤 대답도 닿지 않았습니다.

소녀가 돌아간 뒤 봉제인형은 몹시 낙담했습니다. 슬프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고.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누굴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어 더욱 괴로웠습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 지 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눈물이라도 흘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인형에게는 눈물샘이 없어 그것마저 불가능했습니다.

며칠이 지났을까, 테디베어의 날을 3주도 채 남기지 않은 어느 날이었습니다. 소녀는 다시 한 번 봉제인형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봉제인형이 단념하여 가만히 앉아있자, 소녀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 짓지 말아여. 순간 봉제인형의 마음 속에 물감을 흩뿌린 도화지처럼 색이 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표정이 없는 인형이 울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아채다니,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봉제인형은 자신의 안에서 희망이 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늘 밤에 다시 올게여. 그렇게 말한 소녀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저번과는 달리 봉제인형은 기대로 부풀었습니다. 이 기다림이 기약 없는 기다림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린다는 것이 그렇게나 떨리고도 기분 좋은 일인지 봉제인형은 처음 알았습니다.

그날 밤, 문이 닫힌 박물관에 타박타박 발소리가 퍼졌습니다. 약속대로 소녀가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두 돌아간 박물관에 홀로 나타난 소녀는 곧바로 특대 봉제인형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둘 사이를 가로막은 유리벽을 아무렇지도 않게 열어버리고는 봉제인형을 안아 올렸습니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여. 소녀는 품에서 바늘과 실을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봉제인형의 얼굴에 달린 두 단추를 떼어냈습니다. 그러자 봉제인형의 온몸에 이상한 느낌이 퍼졌습니다. 뜨거웠다가 차가웠다가, 굳었다가 녹았다가. 봉제인형은 흐릿해지는 의식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그런 노력도 소용없이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봉제인형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소녀의 두 호박색 눈이 보였습니다. 안도했다는 듯, 기쁘다는 듯. 소녀는 두 눈을 곱게 휘고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봉제인형은 반사적으로 그 손을 붙잡아 자세를 일으켰습니다. 소녀의 손을 붙잡은 건 틀림없이 인형이 아닌 사람의 손이었습니다. 시원하고도 따스한 액체가 두 뺨을 적셨습니다. 그 눈물을 흘리는 것도 단추 따위가 아닌 사람의 눈이었습니다.

너는 누구야? 더 이상 인형이 아닌 봉제인형이 물었습니다. 몇 번이고 다시 당신을 만나러 올 사람이에여. 소녀는 답했습니다. 그것이 대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질문은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둘은 눈을 마주하고 손을 마주 잡았습니다. 조용한 박물관에는 전시대 하나가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습니다. 애초에 그 자리에 특대 봉제인형은 없었다는 양 말입니다. 함께 박물관을 나선 둘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함께 어딘가를 향해 걸어나갔습니다. 동이 트고 하루가 다 지난 이후에도 계속 함께.

 


"뭐, 그런 이야기야."

노을 지는 저녁, 어느 평범한 교실 내부. 두 여학생이 의자에 앉아 마주보고 있다. 주황빛 장발을 늘어트린 여학생이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 대비되게, 하늘빛 단발을 가진 여학생은 바닥에 닿지 않는 두 다리를 동동 흔들고 있었다. 냉정하고 침착한 메카루, 명랑하고 떠들썩한 이라나미. 여러모로 정반대인 두 사람은 종종 이렇게 함께 시간을 가졌다. 평소에는 수다스러운 이라나미가 이야기를 늘어놓고 무뚝뚝한 메카루는 그 이야기를 무시하듯 흘려듣는 구도가 그려지곤 하였다. 그렇지만 때로는 지금과 같은 예외도 있었다. 메카루가 이라나미에게 이야기를 하고 이라나미가 조용히 그것을 듣는 시간은 언제나 메카루의 집필이 끝난 직후에 찾아왔다.

"무지 재미있었어여! 사츠키가 그 인형술사인 거 맞지여? 인형을 사람으로 만들다니 멋있어여!"

"……그런 거 말고 다른 감상은 없어?"

"나중에 책이 나오면 사츠키가 보육원의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읽어줄 거예여. 분명 이번에도 다들 좋아할테니까여!"

한없이 밝게 웃는 이라나미의 앞에서, 전하려던 메시지가 닿지 않은 것만 같아 메카루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게 된다. 그러면서도 저 즐거워하는 표정을 보면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다 싶고.

"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거지?"

이라나미는 메카루가 할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입을 다물었고, 메카루는 곧바로 말을 잇지 않은 채 잠시 뜸을 들였다. 이것을 위화감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어딘가 자신답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전해야만 할 것 같은 감각에 메카루는 다시 말을 떼었다.

"내가 쓴 동화는…. 꿈 속에서 내가 경험한 것처럼 떠오르는 이야기야."

"무슨 이야기 말인가여? 잃어버린 모자를 찾아 숲속에 들어왔다가 정체를 숨기고 살아온 마녀와 친해진 이야기여? 아니면 노래를 부르지 않는 인어와 바닷가 마을에서 유일하게 헤엄을 못 치는 아이 이야기?"

"전부. 내가 책으로 쓰지 못하고 너에게만 말했던 그 교수와 광대 이야기까지 포함해서, 전부 다."

잠시 정적이 그 장소를 감쌌다. 시선을 피하듯 창밖을 보고 있던 메카루는 이내 고개를 돌려 이라나미의 눈을 마주본다. 그 호박색 눈을 가진 소녀는 어딘가 흐릿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레이도 떠올린 건가여?"

순간 메카루의 눈이 당황한 듯 크게 뜨였다. 실없는 웃음소리를 흘린 이라나미는 배시시 웃으며 느닷없이 손을 내민다. 때론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면서도 저보다 작은 보육원아들을 돌봐왔을 그 작은 손. 그 위로 수많은 동화를 자아낸 손이 부드럽고도 따스하게 겹쳐진다. 유리창을 통해 불그스름한 노을빛이 스며들고 깨지지 않은 고요함이 교실을 채운다. 두 사람은 그대로 서로의 두 눈을 응시한다. 몇 번이고 다시 맺어질 인연을 품에 안은 채.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