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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루이WCC

 소라는 멋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반지, 목걸이, 매니큐어나 패디큐어로 몸을 치장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브로커를 천직으로 삼은 자신이 스스로를 아름답게 가꿈으로써 얻는 금전적 이익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만큼 똑똑했다.

 똑똑한 것 이상으로 아름답기도 했다. 새하얀 머리카락, 그보다 더 새하얀 피부, 그녀의 몸을 훑어보던 무뢰한이 그 자리에서 눈이 도려진 이후로는 누구도 감히 소라를 바라볼 자신을 내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그 위험함이 많은 사람들을 그녀에게 끌어들였다.

 무엇보다 그녀에게서 두드러지는 건 무자비함. 군더더기없는 일 처리였다. 사적인 감정이 일절 담기지 않는 그녀의 행동은 뒷세계에서 귀감이 되었고, 소라와 거래를 할 때 절대 속여선 안 된다는 암묵적 규칙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이따금씩 나타나는 멍청이들. 소라에 관한 소문을 헛소리 취급했거나 객기를 부리거나 혹은 뒷세계에 발을 디딘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은 소라와 거래를 할 때 능글맞게 굴었다. 지금 소라의 눈앞에 있는 길레스피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이봐, 아가씨."

 "무슨 용건이시죠? 사적인 이야기라면 안 받아요. 대금이나 주시죠?"

 "아니. 사적인 이야기 아니야. 공적으로 묻는데. 아가씨 실세는 대체 누구야?"

 "저에게 실세가 있냐는 물음이신가요?"

 "있냐는 물음이 아니라 누구냐는 물음이야. 아가씨. 내 눈은 못 속이지. 일처리는 나름 잘 하는데... 내 직감은 댁이 그저 얼굴마담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어."

 소라는 턱을 괴고 길레스피를 보며 피식 웃었다. 누가 들어도 비웃음이었다. 그녀는 의도를 숨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웃었음을 여과 없이 전달하기 위해 과장된 웃음소리를 낸 듯 했다. 소라의 주변인은 그녀의 턱을 괴는 몸짓은 방울뱀의 똬리와 같다고 말해왔다. 한 발자국 더 다가오면 물어버리기 위한 준비라고.

 "무례하시네요?"

 "무례한게 아니라 단도직입적인 거라고 말해줄래?"

 "뭐. 저야 어느쪽이든 신경 안 써요. 그쪽이랑은 정이 뚝 떨어져서 앞으로는 거래를 하지 않을 생각이니, 마지막 거래만큼은 깔끔하게 끝내시죠? 저 빨리 가야 하거든요."

 길레스피는 소라가 가져온 검은 가방을 챙기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아가씨. 윗대가리한테 말해 놔. 난 연약한 아가씨를 보스랍시고 모셔놓는 사람이랑은 거래 안 한다고. 제 발로 찾아오라고 해. 그럼 대금을 주지."

 "여기에 연약한 아가씨가 어디 있어요?"

 소라가 두 손을 모은 다음 턱을 괴었다. 그리고 길레스피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차가움. 길레스피가 그녀의 눈동자에서 읽은 내용은 그게 전부였다. 냉정함. 그가 눈앞에서 죽더라도 눈도 깜빡하지 않을 잔인함. 길레스피는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말해 봐요. 연약한 아가씨가 어디 있냐니까요?"

 "가오 한번 기똥차게 잡네. 아가씨. 그렇게 자기 주제를 모르면 죽는 수가 있어."

 "누가 죽는데요? 당신? 아니면 나?"

 "아. 정말 짜증나게 구시네. 난 아가씨 살려 줄 생각이었어. 그야 아가씨도 억지로 하고 있는 일일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충성심이 세면... 별 수 없지."

 길레스피는 소라의 안면에 총을 겨눴다. 하지만 소라가 더 빨랐다. 길레스피가 잠깐 겁만 주려는 목적으로 소라에게 총을 대려는 순간에 소라는 이미 길레스피의 검지와 중지를 쏘아 버린 뒤였다. 방울뱀의 송곳니가 손가락을 잘라냈다. 길레스피는 비명을 질렀다.

 "지금 씨발 누가 짜증나게 굴고 있나요? 당신? 아니면 나?"

 길레스피는 욕설을 퍼부으면서 바닥에 떨어진 총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소라는 길레스피의 얼굴을 차 버릴까, 총을 차 버릴까 고민하다가 그의 얼굴을 차 버렸다. 바닥에 세게 부딛친 그는 코뼈가 부러져 버렸고 이내 코에서 피가 줄줄 새어나왔다.

 "이제 말해 보세요. 여기에 연약한 아가씨가 어디 있어요?"

 소라는 그를 내려다보며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길레스피가 뒤늦게 공포를 느낀 건 바로 그 태도였다. 그가 죽어있든 살아있든 괜찮다는듯한 그 표정. 아무런 연민이나 미련, 감정조차 느끼지 않는 눈빛이. 차가우면서 티 한점 없이 빛나는 뱀의 눈동자가 그를 벌벌 떨게 했다.

 거기서 멈췄다면 좋았을 걸. 길레스피는 아쉽게도 위기를 기회로 삼는 사람이었다. 길레스피는 멀쩡한 손으로 뒷짐에서 나이프를 하나 꺼내더니 무릎을 꿇었다가 일어나는 반동으로 소라의 복부를 노렸다.

 그걸 보고 소라는 주저 없이 길레스피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소라는 길레스피의 시체가 싸구려 천에 쌓인 후 추를 달고 심해로 가라앉는 걸 지켜보았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렇게 목숨을 잃었을까.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저렇게 보냈을까. 소라는 잠시 그런 생각을 할 뿐, 감정적인 영역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소라는 시계를 보았다. 약속 시간에는 늦지 않으리라. 소라는 길레스피의 총을 바다에 던진 뒤 차의 시동을 걸었다.

 

 

 


 하시모토 쇼바이는 스스로를 '상업 미술가' 라 칭했다. 자신은 돈을 최고로 좋아하며 예술적 가치나 미술가의 내적 세계따위에는 관심도 없다고 공공연히 말한 바 있었다. 그의 태도는 평론가들의 구설수에 올랐고 종종 질타받기도 하는 그였으나, 그들을 비웃듯이 하시모토 쇼바이는 항상 최고의 그림을 그렸다. 가끔 기사에 실리는 하시모토의 표정은 줄곧 찡그리거나 무기력한 표정 뿐이었지만.

 그는 풍경화, 그것도 섬세하다 못해 정말 그 풍경이 눈 앞에 어른거리는 풍경화를 그렸다. 그것도 짧은 기간 안에. 적어도 일주일에 한 그림은 그려서 팔며 그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돈을 벌었다.

 평생 먹고 살 만큼의 돈을 벌었음에도 하시모토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어떤 사람들은 하시모토의 재물욕은 진심이 아니라 그저 콘셉트에 불과하다고 음모론을 제기했다.

 하시모토는 대중들의 의견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주머니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오는지와 새로 나온 담배의 맛에만 관심을 가졌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돈에 집착하는 이유를 궁금해했다. 자존심. 명예. 모든 걸 버리면서까지 왜 돈을 모으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사채를 썼다. 불치병에 걸렸다. 사채를 쓰고 불치명에 걸린 가족이 있다. 소문은 커져갔지만 전부 진실과는 동떨어져 있었으며, 하시모토는 절대 누군가에게 진실을 발설하지 않았다.

 하시모토가 가장 친한 누군가에게만 귀띔해준 말에 의하면 그는 어릴 적 부모에게서 버려졌다고 했다. 그가 가진 거라곤 그림이라는 재능 뿐이었으며 그것으로 먹고 살기에는 심한 애로사항이 꽃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악착같이 살아남았으며. 그래서 돈을 벌려는 목표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 가장 친한 누군가는 그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친한 누군가였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 버려진 하시모토를 만나서 그에게 손을 내민 사람. 또래 아이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본 뒤 그를 돕도록 마음을 먹은 사람.

 

소라. 

 소라는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하시모토를 만나러 갔다. 만나기보다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구경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소라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눈앞에서 서서히 형태를 갖춰가는 풍경들. 눈앞에 어른거리는 경치들은 죽어가는 소라의 마음을 뛰게 만들었다. 그녀는 하시모토의 그림을 봄으로써 감성을 되살렸다. 누군가를 죽이고 증거를 인멸해도, 마약을 팔고 사는 일을 반복해도, 그녀가 버틸 수 있는 이유라면 지금 이 평화로운 시간 덕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소라에게 일절 눈길을 주지 않았다. 소라도 그게 편했다. 그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하시모토 쇼바이가 벽에 등을 기댄 채 훌쩍거릴 때 소라가 그에게 빵과 우유를 준 이후부터. 그의 그림을 보자 아직 적었던 브로커의 봉급을 털어 그를 '투자'라는 명목으로 지원해준 이후부터. 그들은 그렇게 가까워졌다.

 그리고 퍼뜩 소라는 하시모토에게 물었다.

 "하시모토 씨. 그 그림. 뭐에요?"

 하시모토는 고개를 뒤로 돌려 짜증을 표했다. 소라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허구천날 그가 내는게 짜증이 아닌가?

 "그림이잖아. 너 머리에 눈 안 달려 있냐?"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하시모토 씨도 아시잖아요? 항상 수채화를 반쯤 그리면 유화를 그리시던데. 전 하시모토 씨의 작품 중에 유화를 본 적이 없어서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하시모토는 담배를 한 개비 더 태우면서 붓을 놀렸다.

 "그 유화, 꽤 비싸게 팔릴 걸요?"

 "아니. 반 푼 어치도 안 돼."

 "그냥 하시모토 쇼바이가 그렸다고 밑에 달아놓기만 해도 비싸게 팔릴 텐데. 왜 전시를 안 하시는 거에요? 지금까지 그린 유화만 모아도 차 세 대 정도는 살 수 있을 걸요?"

 "지금까지 그린 유화? 하. 그거 다 팔아봤자 땡전 한 푼 안 나와."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하시모토 씨? 솔직히 말해서 그 유화 잘 그렸어요. 정말. 잘 그렸다고요. 감성에 조예가 없는 제가 봐도 잘 표현했어요. 거칠고 투박한 채색이 인상적이라고요."

 하시모토는 한숨을 푹 쉬더니 담뱃재를 털고, 기름물감이 잔뜩 묻어있는 캔버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고보니 너한테는 유화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여준 적이 없네. 뭐.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겠지만."

 하시모토는 캔버스에 라이터를 대었다. 기름이 묻어있는 캔버스의 중심에서부터 삽시간에 불이 번져나갔다. 소라는 당황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을 찾았으나, 하시모토는 익숙하다는 듯이 간이 소화기로 화재를 진압했다. 그림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이게 '지금까지 그린 유화들' 을 태워봤자 땡전 한 푼 안 나오는 이유다. 잘 봤지?"

 소라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행동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돈을 좋아하며, 저 훌륭한 유화들은 분명 비싼 가격에 팔렸을 테다. 그런데 그냥 태워 버린다고? 선물도 아니고 파는것도 아니고 그냥 가치를 0으로 만들어버린다고? 소라의 표정을 보자 하시모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게 유화였어. 그림 막 시작할 때. 네 투자 받고 물감을 샀을 때. 난 유화 물감을 샀어."

 소라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뭐. 그렇게 아마추어 티 벗고 프로처럼 해보자. 그런 일념으로 예술적 가치와 내 내면세계를 담았지. 그런데..."

 하시모토는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비벼껐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방에 차올랐다.

 "한 점도 안 팔렸더군. 뭘 표현하는지 모르겠다. 이 그림은 쓰레기다. 예술이 뭔지도 모르는 것들이 와서 훈수두는 꼴을 보자니 속이 뒤틀리더라. 지나가던 깡패 새끼들이 내 그림을 다 찢어버리고 웃으며 술집에 들어가는 날, 난 절대 이런 그림을 팔지 않겠다고 다짐했어."

 "그래도 하시모토 씨는 이제 대단한 미술가시잖아요. 돈만 밝히는 쓰레기지만. 지금 하시모토 씨의 유화에 환장할 사람들이 수천은 된다고요."

 "난 쓰레기이긴 하지만, 쓰레기도 나름대로의 신념이라는 게 있어."

 "그럼 유화는 왜 그리시는 거에요? 그걸 파실 생각이 결국 있으신 거 아니에요?"

 "난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야. 내가 개인적으로 유화를 그리는 걸 좋아하고, 수채화는 신물이 날 정도로 지긋지긋하고. 유화를 그리는 시간이 내 정신을 지탱한다고 한들 그걸 파는 것과 그리고 태우는 건 큰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하시모토 씨. 계속 유화를 그려도 태우는 걸 반복하실 거에요?"

 "당연하지." 

 "하지만 하시모토 씨. 이 그림을 그릴 때..."

 "웃고 있었어. 그건 나도 알아."

 하시모토는 캔버스를 하나 더 꺼내고 수채화를 시작했다. 지겨움, 무기력, 권태감. 그것들이 하시모토의 표정을 채워갔다.

 "내 첫 번째 후원자지만 미안하게 됬다.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냥... 너무 빨리 실패를 맛본 사람이 어떻게 죽어가는지나 지켜봐 줘."

 그는 소라에게서 등을 돌리고, 기계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 등은 너무 좁아 보였다.

 소라가 하시모토의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하시모토의 붓은 흔들리지 않았고,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눌 수 있는 대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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