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형상기억

미랭

마에다는 요즘들어 얕게 꿈을 꾸는 일이 잦아졌다. 갑작스럽게 위험한 상황에 놓인 데다, 아직 그 상황에 익숙해지지도 못했으니 어설픈 꿈으로 잠을 설치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원래의 성격대로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 거라며 금방 잊어버렸겠지만, 그 꿈을 가볍게 넘겨버리기에는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꿈인데, 어디선가 이 일을 이미 겪어 본듯한 기시감에 시달리는 것이다. 수많은 확률과 감히 넘겨짚지도 못할 요소들로 조잡하게 구성된 '절대 일어날 일이 없는' 꿈이 아니라 이미 일어났던 일을 다시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듯한 느낌이었다. 꿈 속에서 눈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나던, 마에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그랬다. 전부 다 알고 있었고, 모두 예상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꿈의 중심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꿈 속에서는 항상 그의 냄새가 진동했다. 마에다 자신도 그도 서로에게 가까이 접촉한 적은 없으므로 가까이서만 맡을 수 있는 아주 강렬한 냄새는 아니어도, 잠깐동안 옆을 스쳐 지나갈 때 어렴풋이 맡을 수는 있을 정도의 냄새다. 화염의 냄새. 마에다는 그 냄새를 그 정도로 표현했다. 무언가가 불에 전부 타버리고 남은 재의 냄새와, 얇게 깔려있는 휘발유 냄새, 나무가 타들어갈때 진동하는 뜨거운 냄새, 그 사이에서 어울리진 않지만 꽤 그럴싸하게 섞여들어가있는 묵직한 향수 냄새가 그것이다. 작열하는 화염이 바로 근처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냄새. 꿈 속에서 그가 얼굴을 비추지 않아도,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모습을 까먹어버려도 항상 그 냄새로 그가 있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누군지는 알고있다. 그런데 왜 그가 나오는지는 모른다. 그는 분명 마에다와 초면인데다 그 점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마에다가 엮일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솔직히 평범한 학생인 마에다의 입장에서 초고교급의 학생들은 엄청난 우연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얼굴 마주치기도 힘든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에다는 더욱 더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 그인지. 그것도 현재 상황에서 가장 위험인물인 그를. 꿈을 계속해서 꿀 때마다 궁금증이 점점 부풀어 갔지만 지금의 마에다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 그에게 혹시 어디서 만난 적 있냐는 드라마틱한 대사로 직접 물어 볼 수도 있었으나 왠지 모르게 그건 내키지 않았다. 그가 모든 일의 흑막이라고 밝혀서가 아니라, 그래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참혹한 진실을 애써 감추듯이 마에다는 간절하게 알고싶으면서도 또 알고싶지 않았다.

꿈의 내용은 이제껏 보내왔던 일상처럼 익숙했고, 항상 꿈에 나타나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몇년을 본 것처럼 익숙한 몸짓,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얼굴. 하지만 현실에서의 그는 꿈 속에서와는 딴판으로 이질적이다. 현실의 그는 마치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것 같다. 조금 텐션이 높은 듯한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고 가벼운 몸짓도 전부 작위적이었다. 마에다는 그가 나타날 때마다 관심없는 척 하면서도 그를 유심히 관찰해보았지만, 아무래도 꿈 속에서의 그의 모습이 진짜고, 현실에서 보는 그의 모습은 가짜라고만 느껴졌다. 분명 꿈 속에서의 그는 그렇게까지 방정맞지는 않았다. 꿈 속에서의 그는 깊은 상처를 숨기려고 매끈하고 단정한 모습을 둘러쓴, 지금보다 좀 더 고고한 느낌이었다.

꿈 속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꿈이 끝날 때쯤엔 항상 날카로운 날붙이로 거칠게 찢어발겨지는듯한 느낌이 들었고,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곤 했다. 그렇게 꿈에서 깨어나면 한동안은 이유모를 두통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절로 치밀어 오르는 토기를 억누르며 팽팽 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사이 꿈의 내용은 거의 잊혀져버리는 듯했다. 전반적인 내용은 연기처럼 날아가 버렸지만 머릿속에는 마치 화상 흉터처럼 잔상이 남았다. 

 

절대로 무시할 수 없게 흉터를 남기는 듯한 꿈. 마에다는 원래도 잠이 많은 편이지만 그 기묘한 꿈을 꾸고 나서는 늦잠을 자는 일이 더 많아지는 바람에, 안그래도 살얼음판인 상황에서 종종 클래스메이트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받곤 했다. 그러다보니 어쩐지 잠드는 게 두려워져서 심야 시간이 되면 불이 꺼진 방에 홀로 무릎을 끌어안고 밤을 지샐 때도 많았다. 

꿈에 시달리는 마에다와 달리 현실에서의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물론 당연한 일이다. 마에다가 꾸는 꿈은 현실에서의 그와 전혀 관련이 없으니 그가 모르는 것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행동하는 것도 당연하다. 마에다는 그게 싫었다. 태연하고 뻔뻔하게 행동하는 그를 볼 때마다 심지가 뒤틀렸다. 붙잡고 하소연을 해볼까 싶었지만 그와는 한두번 말을 섞어본 것이 전부고, 단둘이 있는 시간은 아예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둘은 어색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데면데면한 사이다. 그런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꿈 얘기를 꺼낼 정도로 마에다는 넉살이 좋은 편이 아닌데다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뒤집힌 속내를 들키기 싫어서, 대화를 하기가 싫었다. 

마에다는 그에게 직접 물어보는 대신 데자뷰가 이는 듯한 그 꿈을 꿀 때마다 방에 있던 작은 수첩에 그 내용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냥 잊어버리는 것보다는 확실히 기록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수첩에 적기 전의 내용은 거의 다 까먹어버려 생각보다 많이 적지는 못했지만, 워낙 특이한 꿈이라 반절 넘게는 어떻게든 기억해낸다. 대부분의 내용은 침대에 누워 있는 마에다를 그가 일방적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와 마에다는 종종 대화를 하곤 했는데, 대화했다기보다는 그 혼자 떠드는 것에 더 가까웠고 마에다는 이유 모를 감정에 목구멍이 짓눌려 그저 그를 바라만 보거나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다였다. 워낙 여러 번 반복된 장면이라 대화의 내용은 온갖 시간들이 뒤섞여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조금만 더 견디면 된다'라고 말했던 것은 확실하게 기억한다.

 

 

꿈을 꾼 뒤 일어나면, 펜을 들어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대로 글자를 적어내려 간다. 꿈속에서의 기억인지 현실에서의 기억인지, 마에다는 찬찬히 그 불확실한 기억을 되새겼다. 

 

 

오늘은 그와 함께 식사하는 꿈을 꿨다. 아니다, 그는 식사하지 않았다. 나 혼자만 식사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나를 끈덕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내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내 입술 속으로 밀려들어가는 음식을 찬찬히 관찰하면서, 내 목울대가 울리는 것까지 확인하면서 집요하게 바라봤다. 아무 말도 없이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접시 위의 음식이 깔끔하게 비워지자 그제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 내게 맛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정말 맛있었다고 대답했고, 그건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는 묘하게 웃는 것 같았다. 더 먹을래? 하고 그가 물었다. 사실 배가 차지 않았지만, 나는 말없이 포크를 내려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더 먹으면 안돼.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저절로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왜 네 음식을. 그런 생각이 들어서 물러나버렸다. 내가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을 푸르는 것까지 전부 봤으면서 그는 가만히 앉아 기다린다.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머뭇거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는 본 척도 하지 않고 여전히 기다렸다. 기분이 나쁘다. 내가 절대로 아니, 싫어, 라고 거절하지 못할 걸 자기가 제일 잘 알면서. 

 

 

*

 

 

이제껏 정말 평범하고 무난했던 인생이었고, 그 인생에서 누군가, 혹은 어떤 운명과 크게 부딪쳐보기도 전에 이 섬에 왔다. 그리고 지금은 한정적인 공간 속에서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생명줄을 붙잡고 살고 있다. 정확히는 살아남고 있다 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데 그는 대체 어느 시간대, 어느 공간에서 마에다의 기억 속으로 끼어들어 온 걸까. 

 

 

*

 

 

마에다 씨. 왜 넋을 놓고 있어요?

 

멍하니 서 있는 마에다를 소라가 툭툭 쳤다. 뒤늦게 정신이 든 마에다는 화들짝 놀라며 잠깐 멍해졌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조사를 한답시고 섬을 돌아다니고는 있지만 생각보다 진척이 없다. 이 작은 섬에서 도움이 될 만한 단서라고는 어디에도 없었다. 뭐라도 발견한 게 있냐고 묻는 소라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며, 마에다는 계속 꿈에 대해 생각했다. 소라는 말없이 그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슬쩍 눈치를 보다, 조금씩 말을 흘린다.

 

"소라는 요즘 좀 어때? 잘 때 악몽을 꾸거나 하진 않아?"

"글쎄요. 아무래도 이런저런 일이 있었으니까 저도 편하게 자진 못했어요. 꿈자리가 사납긴 했는데 잘 기억은 안나네요."

"으응, 그렇구나……."

"꿈 같은 거 담아두고 사는 타입이 아니라서. 계속 붙잡고 있는 것도 힘들잖아요."

"그런가."

 

 

마에다는 곰곰이 생각한다. 내가 지나치게 붙잡고 있는 걸까. 쓸데없는 꿈을. 아무리 그래도 그 꿈을 단순히 개꿈으로 치부해버리기엔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그의 모습은 점점 더 확연해져만 간다. 마에다 또한 그 꿈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나중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에게 인사를 하거나, 어제는 고마웠어, 라고 바보같이 말을 붙여 버릴 것만 같다. 이러다가 꿈에 먹혀버리는 게 아닌지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게 된다. 평소보다 심하게 흐트러져있는 마에다의 모습에 소라는 마에다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이어 말했다. 단정한 회갈색 눈동자는 마에다의 눈동자와 달리 차분하고 안정되어 있었다.

 

"요새 악몽 꾸시나 봐요."

"아, 응. 그렇긴 한데."

"다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껏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면 쾌면하는 게 이상한 거에요."

"……고마워, 소라."

"꿈속에서 뭔 일이 일어나던 앞으로 일어날 일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전혀 위로가 안되는데. 그 말은 내뱉지 않고, 속으로 삼켰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도 그렇게 말했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나는 가만 있으면 된다고. 그 말투는 나를 진정시키려는 게 아니라 나를 위협하고 몰아세우는 듯한 말투였다. 거슬리게 하지 말고 가만 있으라는 무언의 압박. 알잖아. 넌 원래 죽었어야 할 사람이야. 기적적으로 살 수 있게 됐으면, 다시는 눈에 띄지 않도록 숨죽이고 살아가는 거야. 그때 그렇게 살려달라고 빌었잖아. 그렇게 얻은 목숨을 다시 내버리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저 그의 뒤에 잠자코 숨어 있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숨소리도 내지 않고 살았다. 혹시 몸이 자라면 더 눈에 띌까 봐, 그의 품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또 웅크렸다. 신기하네. 봐봐, 하나도 자라지 않았어. 처음 봤을 때랑 똑같아. 내 뒤에 바짝 붙어서 팔뚝을 쥐어보며, 손바닥을 멋대로 펼쳐보며 그가 말했다. 그가 말하는 게 마치 칭찬처럼 들렸다.

 

 

*

 

 

새벽 세시쯤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설프게 잠들었다가 눈을 뜨면 늘 이 시간이었다.

마에다는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공간에서 눈을 떴다. 잠들었던 침대 위에서 그대로 깨어났지만,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는 확실하게 가늠할 수 없었다. 방 안에 한가득 내려앉은 어둠은 새파래서, 왠지 모르게 기이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마저 풍기고 있었다. 그 푸른 공기 사이로 그림자가 하나 어룽져 있는 게 보인다. 마에다는 잘 잡히지 않는 시야 속에서 억지로 눈을 찡그리며, 그 그림자에 초점을 맞추려 했다. 아, '그'다. 그가 마에다의 침대 위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그의 시선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이건 또 하나의 진짜 기억일까, 아니면 그저 혼자만의 꿈일까. 마에다가 느릿하게 그에게로 손을 뻗자 그는 그 기척을 알아채고 마에다가 누워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무표정은 여전했다. 인격이 부여된 것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던 가면의 얼굴도, 지금은 딱딱하게 멈춰 있다. 마에다는 뻗던 손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그의 가면에 갖다 댄다. 반절이 깨져 나간 그의 가면을 훑고, 자신을 내려다보느라 흘러내린 탁한 금발의 머리카락을 지나, 조금 상기되어있는 볼에서 멈췄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은 계속 감촉을 느끼려는 듯 볼을 쓰다듬었다. 피부의 온도는 뜨뜻하다. 꿈 속에서 이렇게 현실적인 촉감을 느낄 수 있던가.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되새기려는 듯 연신 볼을 만져댔지만 그는 마에다가 무엇을 하던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 말도 없이 마에다를 내려다 볼 뿐이다. 언제나의 꿈처럼.

애틋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 또한 데자뷰다. 마에다는 계속 생각했다. 나는 분명 너를 처음 봤을텐데. 이제껏 너와 접촉한 적도 없었는데. 왜 닿으면 닿을수록 애매모호한 기억의 덩어리가 진짜 기억으로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 드는건지. 왜 나의 삶 속에 너가 있었다고, 그것도 아주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도저히 무시하고 지나칠 수가 없다고 믿게 되는지. 왜 보면 볼수록 점점 더 확실해져만 가는건지.

 

잠깐 보러 왔어요. 이정도는 괜찮잖아. 가면의 입이 아니라, 그 밑에 반쯤 가려진 입술이 열렸다. 마에다의 입장에서는 직접 입술을 비틀어 말하는 그의 모습이 놀라울 만도 하지만, 꿈 속에서의 그는 가면 같은 걸 쓰지 않았으므로 사실 이쪽이 더 익숙하다. 그는 눈을 살짝 내리깔고, 한숨처럼 말한다. 여기서 자는 것도 아니니까. 그는 지금 연기하고 있는 게 아니다. 진짜로 말하고 있었다. 대본에서 정해진 대사를 읊는 것이 아니라 진짜 자기 생각을 입 밖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마에다는 무겁게 가라앉은 듯한 공기 속에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를 왜 보러 오는데? 그 말에 그의 입꼬리가 거짓말처럼 말려 올라간다.

 

그야 당연히, 보고싶으니까죠. 진짜 내 모습을 알아보는 마에다 군을. 그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작은 불꽃마냥 잔잔하게 떠다녔다. 화염의 냄새가 난다. 그의 목소리에서 홍차가 우려지듯 배어 나오는 것 같다. 마에다의 위로 드리워진 그의 망토는 마치 우주마냥 널따랗게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밤하늘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한 망토. 마에다는 언젠가 그 망토에 감싸여진 적이 있다고, 그 망토가 거센 불길 속에서 휘날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그 망토에 얼굴을 묻은 적이 있다고 진짜 존재할 지도 모르는 기억을 떠올려낸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 손길도 익숙하다. 머리를 내키는 대로 마음껏 쓰다듬은 후에는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는 척 하면서 자연스럽게 볼을 감쌀 것이다. 볼을 몇번 부드럽게 문지른 후에는 목덜미를 가벼이 지나 어깨를 둥그렇게 감싸 쥘 거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따뜻한 얼굴에 비해 제 몸에 닿는 손가락은 때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하다는 것도, 전부. 

그의 손길이 마에다의 기억을 따라 목덜미쯤으로 내려왔을 때, 마에다는 서늘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순간 그의 얼굴이 살짝 동요한 것 같았지만 이내 빠르게 평정을 되찾는다. 마에다의 복잡해진 머릿속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인지 그의 손은 어깻죽지까지 가지 못하고 그대로 목덜미에서 물러났다. 서로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한 채로 한참동안이나 시선이 얽힌 후에, 이번에는 마에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꿈에 자꾸 네가 나와. 그 말에 그는 미세하게 웃었다. 주춤거리는 손길이 다시 얼굴로 다가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얼굴을 감싼다. 마에다는 목이 메이고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힘겹게 말을 이어간다.

 

왜 네가 나오는지 모르겠어. 만난 적도 없는데……어디선가 만난 듯한 기분이 들어. 어떨 때는 그냥 나란히 앉아있기도 하고, 내가 일방적으로 네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대화를 해. 같이 식사를 하기도 하고, 어딘가로 걸어가기도 하지. 그런데, 네가 나오는 것보다 중요한 건 내가 그 모든 일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는 거야. 진짜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게 익숙하면서도 또 익숙하지 않다. 만약 그의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마에다는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절대로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신기할 정도로 표정이 휙휙 바뀌는 가면과는 달리 그의 진짜 얼굴은 어떤 상황에서든 무표정을 유지했으니까. 그는 꿈 속에서 허우적대는 마에다를 진정이라도 시키듯이 몇번이고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꿈이라는 건 위험한 거에요. 그 모든 것이 거짓이더라도 그 안에 확실한 존재가 하나라도 있으면 전부를 진짜라고 믿게 되니까요. 마에다 군이 저와 했던 모든 것이 실은 존재하지 않던 일이라도, 마에다 군의 꿈 속에 있는 저는 진짜로 존재하니까 자연스럽게 그 일이 있었다고 믿게 되는 거랍니다. 만약 제가 마에다 군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마에다 군은 이 꿈에 흔들리지 않았을 거고, 더 나아가서는 꿈을 꾸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결론은 그거에요. 마에다 군과 제가 만났다. 마에다 군의 기이한 꿈은 전부 거기서 시작된겁니다. 만나선 안될 사람이 만났다구요.

 

마에다는 비몽사몽한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굴렸다. 상대방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자주 하는 버릇이다. 그는 마에다의 얼굴에서 손을 떼지 않고, 숨결이 귀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장난스러운 말투로 속삭인다. 마음이 저절로 평온해질 정도로 낯이 익은 말투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요. 때가 되면, 전부 알게 될테니까. 저도 모르게 숨을 참은 마에다가 다시 그의 가면에 손을 댔다. 아까와는 달리 가면이 쉽게 툭, 떨어져내린다. 그의 맨얼굴을 볼 틈도 없이, 찢겨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뭉그러든 어둠 속으로 정신이 빨려 들어간다. 

 

그는 의외로 진지한 사람이다. 특히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땐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차가운 기운을 뿜어낸다. 모습을 감추고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그 몸짓은 조심스럽지만 언제 터질 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다. 그런 그가 견딜 수 없이 무섭고 두려워서 나는 그가 내 방으로 찾아올 때면 어김없이 자는 척을 하곤 했다. 맹수의 눈을 피해 숨죽이고 있는 작은 동물이 된 나는 그의 발소리가 들릴 때면 숨부터 참았다. 그는 그런 나를 건드리지는 않았고, 나를 한참동안이나 내려다보다가 그냥 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언젠가 내가 숨이 차 기침을 해버렸을 때, 그는 내 곁에 앉아 낮게 웃으며 왜그러냐고 다정하게 물었다. 사실 다 알고 있으면서. 알고 있으면서 모른척 하는 것은 그의 특기였다. 행여 해코지라도 당할까 벌벌 떠는 모습을 보이면 식은땀을 닦아주며 악몽이라도 꾸었느냐고, 정 무서우면 내 방에 와서 자도 된다고 홀릴듯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나는 그런 얍삽한 그의 모습을 보고도 신경질을 내거나 기분 나쁜 티를 낼 수가 없을 정도로 기가 질려 있었고, 마지못해 따라간 그의 방에서 일에 몰두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숨을 계속해서 참다가 기절하듯 잠들곤 했다.

 

 

*

 

 

튕겨지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마에다는 식은땀을 닦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또, 그 꿈이다. 

침대를 급하게 더듬어 수첩을 찾아낸 후, 제대로 뜨지도 못한 눈으로 그 꿈을 적어 내려간다. 어둠 속에서 물건을 찾듯 서툴게 기억을 더듬었다. 그렇게 한참을 적어 내려가다 멈춘 마에다는 갑자기 안 좋은 느낌이 들어 눈만 굴려 시계를 봤다. 시침은 아침 아홉시를 막 넘어가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한 마에다의 머리가 힘없이 베개 위로 푹, 쓰러진다. 이틀 연속으로 늦잠이다. 항상 클래스메이트끼리 아침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었는데, 이렇게 가다간 따로 무슨 일을 꾸미는 게 아니냐며 의심을 사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잘 지내던 사람들과 순식간에 적대적인 관계가 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놀랄 기운조차 없었다. 

 

휘갈겨 적은 글씨들을 찬찬히 훑어보니 어쩐지 위화감이 든다. 그가 내 방에 들어와서 나와 대화하고 접촉했던 일은 꿈이 아니라 현실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가 실제로 내 방에 들어온 것은 아닐까. 그는 불길과 함께 나타나고 사라지는 등 정말로 마법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여러번 보였었다. 정말로 그가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면 내 방에 들어오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왜 나를 보러 왔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서로의 방을 왕래할 정도로 친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 편하게 지낼 만한 사이도 아닌데 왜? 반대로 그는 나에게 별다른 짓을 하지도 않았다. 죽이는 거라면 얼마든지 바로 죽일 수 있었을텐데……마에다는 엉킨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고 불어나기만 하는 생각들을 억지로 꾸역꾸역 끌러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땀이 밴 손에서 펜이 미끄러질 뻔 해서, 다시 고쳐 잡는다.

멍하니 펜을 쥐고 있는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마에다는 수첩을 베개 밑으로 밀어 넣고 황급히 달려나가 문을 열었다. 소라였다. 옆에는 카부야도 같이 있었다.

 

"소, 소라, 카부야……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아홉 시가 넘어가도록 마에다가 나오질 않으니까 찾아 온 거지. 좀 전에도 소라가 문을 한번 두드렸었는데 안 나왔었고."

 

카부야는 얼굴에 근심과 짜증이 가득했다. 소라는 평소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지만,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있는 것쯤은 마에다도 느낄 수 있었다. 미안함에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서, 마에다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미안……자느라 못 들었어."

"혹시 마에다 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거 아닌가 싶어서 확인하러 와 봤어요. 별일 없는 것 같네요."

"정말…어제도 늦었으면서. 이렇게 자꾸 늦으면 괜히 의심스럽다고."

"아하하, 다음부터는 제 시간에 나갈게."

 

마에다는 멋쩍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넘겼지만 마에다의 얼굴이 굉장히 심각해보인다는 건 누구라도 눈치챌 정도였다. 막 일어나는 바람에 더 부스스하고 붕뜬 머리, 잠을 제대로 설친 듯 퀭한 눈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붉게 달아올라 있는 얼굴, 실핏줄이 어지럽게 얽힌 눈은 딱 봐도 마에다가 괜찮은 상태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소라가 뭔가 더 말을 하려고 입술을 열다가 곧 다물었고, 카부야는 다음번에 늦으면 위험인물로 찍어둘 거라며 신신당부를 하고 돌아갔다.

 

소라와 카부야가 돌아가자마자 마에다는 다리에 힘이 풀려 문을 닫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머리가 어지럽다. 무언가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처럼 답답했다. 이대로는 안된다. 이젠 어떻게 해서든 담판을 지어야 했다. 평범한 일상에서도 더 이상 용납하지 못할 일탈이었지만 이렇게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를 만나던가, 혹은 혼자서라도 해결해야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얼빠진 모습을 보이는 것도 창피했지만, 그 모습을 스스로 받아들이기도 힘들었다. 조금이라도 해결해보자고 속으로 결심한 마에다는 아직도 그의 손길이 남아 있는듯한 볼가를 문지르며 비척비척 화장실로 향했다. 뒤늦게 배고픔이 밀려 왔지만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로 기운이 빠져 있었다.

 

그의 온기가 아직 손에 남아있다. 찬물을 손에 끼얹어 봐도 그 느낌은 그대로였다. 그의 얼굴을 그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저릿한 일이었다. 마음이 욱신거리는 것이 불쾌함 때문인지 혹은 그리움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와 있었던 일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리자 괜시리 머리만 더 복잡해져, 마에다는 정신이 바짝 들 정도로 찬 물로 세수를 했다. 냉기가 찌릿찌릿 오르면서 꿈에 대한 기억도 차차 희미해져 간다. 기억의 열기는 식었지만 자국은 지워지지 않는다. 뒤늦게 상처가 욱신거리기라도 한 것처럼, 물이 들어간 코가 시큰거렸다. 

 

마에다는 물기를 닦고 걸어뒀던 교복 마이를 걸쳐 입으면서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를 만나야겠다고. 그가 이 고생을 모르더라도 나는 전해야겠다고. 마에다가 결심하게 된 건 단순히 오늘의 꿈 때문만이 아니다. 꿈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데자뷰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면 그의 아주 사소한 몸짓을 보고 지금 어떤 감정인지 알게 된다거나, 그의 버릇과 습관들을 알아차리게 된다거나 하는 것이었는데, 꿈에서 일어나는 데자뷰와는 느낌이 약간 달랐다. 심지어는 단순히 물건을 보는 것만으로도 데자뷰가 느껴지곤 했다. 그의 챙이 넓은 모자를 볼 때면,

 

그의 모자를 유심히 바라본다. 마법사가 그런 모자를 썼던가. 그렇게 큰 모자를 쓰면 앞도 안보이지 않을까. 그런 시덥잖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는 모자 쓰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싫어했다. 그는 실내에 있을 땐 자주 모자를 벗어두곤 했다. 옷걸이에 가만히 걸려있는 모자……왠지 그걸 보면 안심이 됐다. 그가 자신을 감추지 않고 있다는 뜻이니까. 아직까진,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그는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짓는 확실한 남자니까. 나는 확실히 알고 있다. 그는 방에 돌아오면 모자부터 벗었다. 모자를 옷걸이에 건다는 건 그의 할 일이 전부 끝났다는 걸 의미했다. 

이런 생각이 떠오르곤 했고 멀찍히 떨어져 있는 그의 망토를 흘깃 봤을 뿐인데도,

 

그는 밤하늘을 둘러쓴 것 같았다. 태양의 브로치를 달고 태양의 화염과도 비슷한 불을 내뿜으면서 밤하늘을 둘러쓰고 있단 말인가. 아니, 그의 망토는 밤하늘보다 우주를 표현한 걸지도 모른다. 내가 별을 이어 별자리를 만들듯이 그의 망토를 손으로 훑고 있으면 그는 말없이 나를 지켜보다가 망토가 마음에 드느냐고 묻곤 했다. 이렇게 망토 색깔이 어두워야 피가 튀어도 티가 안난다고, 험악한 소리를 내뱉기도 하지만 그저 나를 겁주기 위한 허울뿐인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피칠갑하기엔 아까운 망토인데. 내가 슬쩍 말하자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던 기억이 되새겨지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모습이나 기억의 매개체를 직접적으로 보지 않아도 기시감은 느껴졌다. 오늘은 넥타이를 안 매셨네요, 하고 말을 걸어오는 소라에게 응, 하고 대답하다가도 뜬금없이 그의 넥타이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언젠가 내가 그에게 넥타이를 꽉 매지 않느냐고 물어봤을 때, 그는 목이 졸리는 게 싫어서 그렇다고 대답했었다. 그는 넥타이를 안 맬 때가 더 많았고, 매더라도 묶지 않은 채 그냥 목에 걸어두거나 대충 묶어 금방이라도 풀려버릴 듯하게 하고 다녔다. 처음에는 그가 넥타이를 못 묶어서 그런게 아닐까 싶었으나 내게 연미복을 골라주면서 내 넥타이를 능숙하게 매는 걸 보고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의 넥타이는 여느 평범한 넥타이와는 달리, 끝부분이 네모지게 딱 떨어지는 넥타이였다. 그는 평범한 것보다는 조금 특별한 걸 매고 싶었다고 중얼거린다. 내가 그마저도 잘 안 매고 다니면서, 하고 투덜대자 이젠 말대꾸도 하네, 라고 말하며 엄지 손가락으로 내 볼가를 꾹 누른다.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을 때 끝맺음으로 하는, 그의 오래된 습관이다. 

 

현실까지 점점 손을 뻗쳐 오는 기묘한 데자뷰에 마에다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이상한 병이라도 걸린 걸까. 이제껏 벌어진 일들을 납득할 수 없고, 단지 같은 초고교급의 학생, 클래스메이트인 줄 알았던 그가 기대했던 학교생활을 망치고 괴상한 수학여행에 밀어넣은 장본인이라는 걸 믿고 싶지 않아서일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자신이 미쳤다고 해도 마에다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 또한 자신에게 데자뷰를 느끼는지, 그도 비슷한 꿈을 꾸는지, 그걸 알고 싶었다. 자신은 어디다 털어놓지도 못할 일 때문에 하루하루 지쳐가고 있는데 그는 멀쩡하게 나돌아다니는 것이 얄미워서 보상심리 때문에 그런것도 있었지만 정말로 그와 만난 적이 있다면 그도 자신에게 데자뷰를 느끼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만약 아는 사이였다고 해도 왜 그가 마에다를 모른 척 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어차피 엉망이 되어버린 퍼즐 속에서 단 하나라도 맞추자는 것이 마에다의 생각이었다.

 

마에다는 아침도 먹지 않은 채로 그의 방 앞에 달려가 문을 조심스레 두들겼다. 주위에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침식사에 참여하지 않아 눈총을 받는 상황에서 그와 따로 접촉하는 모습이 들키면 그의 내통자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는 마법으로 이곳저곳을 쏘다닐 수 있는 사람인데 방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그 생각을 했던 게 무색하게 곧바로 문이 열렸다. 그는 문을 두드린 사람이 마에다라는 걸 알아보자마자 잠시 굳어있었으나, 마에다가 알아채기 전에 언제나의 그처럼 텐션이 높은 말투로 장난스럽게 말을 건다. 말하는 쪽은, 가면이다.

 

"어라? 마에다 군이네요. 오늘 아침엔 식사하러 오지도 않았던데……무슨 일 있었나요?"

"……할말이 있어. 들어가게 해줘."

"괜찮은건가요, 이렇게 제 방에 함부로 들어와도?"

 

그가 경고하듯 속삭였지만 마에다는 개의치 않았다. 마에다가 물러나지 않자 그는 어쩐지 즐거워보이기까지 하는 목소리로 떠들었다. 아, 이래도 물러나지 않네요. 마에다군은 이름처럼이나 용감하군요. 꿈 속에서처럼 다 알면서 장난치는 듯한 그의 태도에, 기분이 상해 그를 밀치고 방에 멋대로 들어갔다. 그는 별말없이 문을 닫았다. 여기서 그에게 죽거나, 다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수 없다. 비장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에 떨고 있는 마에다를 바라보던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태평하게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죠? 저도 여러분과 함께 조사해야 하거든요. 이렇게 마에다 군과 농땡이 피우는 것도 적당히 해야 한다구요."

"……그러니까."

 

 

각오를 하고 찾아왔어도 막상 입을 열려니 말문이 막힌다. 두통은 사그라들었으나 돌덩이가 눌러앉은 듯한 가슴의 답답함은 그대로였고, 목구멍조차도 무언가가 턱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저 웃고 있는 가면의 얼굴과는 달리 마에다를 응시하는 그의 얼굴은 차갑도록 굳어 있다. 그 내려다보는 듯한 눈빛을 보니 저절로 몸이 수그러들었다. 그 눈빛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얌전히 있다가 조금이라도 튀어 나갈라치면 그런 자신을 거칠게 제지하면서 짓는 표정이었다. 네가 뭘 알아? 니까짓게 뭘 아는데? 방해될 만한 일 좀 하지마. 분노에 이글거리는 듯한 그의 모습에 울컥해 뭐라고 대꾸라도 하려 했지만 뒤이어 쏟아지는 말에 입을 다물었던 기억이 있다. 너 지금 내가 뭐하는지 모르지?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럼 가만히 있어.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다. 그는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로 참을성 있게 기다렸고, 마에다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꾸, 꿈 속에……."

"잘 안들립니다만."

"그러니까, 꿈 속에…! 계속 네가 나와. 그, 그래서……."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몸이 저절로 떨린다. 이 방의 온도만 다른 것처럼 한기가 느껴졌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이다. 마에다는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 지 몰라 고개를 아래로 처박은 채로 땀이 찬 손만 꿈지럭대고 있었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제 존재가 너무 강렬해서 제 꿈까지 꾸는 건 이해하겠지만요, 그게 제 방까지 멋대로 들어와서 할 말인가요?"

"……."

"마에다 군은 생각보다 실없는 사람이군요. 뭐, 재능을 들었을 때부터 어느정도 예상했습니다만……."

"그렇게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라고!"

 

마에다는 괜히 감정이 북받쳐 올라 크게 소리쳤다. 그는 미동이 없었다. 할 말이 있으면 더 해보라는 식으로 삐딱하게 마에다를 바라본다. 괜히 더 기분이 나빠졌다. 현실도 아닌 꿈 속에서 나타나는 그 때문에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인데, 이렇게나 태평한 태도라니. 저절로 이가 악물어진다. 게다가 자신의 재능을 비하하는 듯한 태도는 또 뭔가. 아무리 추첨으로 입학했다지만 그걸 대놓고 깔보는 태도는 기분이 상했다. 모두와 친해지고 싶다고 살갑게 굴던 모습과는 달리, 이상하게도 지금의 그는 언뜻 불쾌감까지 비칠 정도로 마에다를 차갑게 대하고 있었다. 

 

"너랑 만난 적도 없는데 계속해서 네 꿈을 꾼단 말이야. 일어나서도 한참동안 머리가 아프고, 어제도 네가 내 방에 들어와서……."

"제가 마에다 군 방에 들어갔다구요?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면 안 되죠, 마에다 군."

"그러니까 그건……."

"뭐…제게 해결해달라고 말씀하시는 거라면 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독한 수면제라도 만들어 드릴까요? 물론 먹고 영원히 못 깨어날지도 모르지만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지만 그의 얼굴에는 묘한 혐오감이 스며들어 있다. 그걸 눈치 챈 마에다는 더 기가 죽었다. 자신만 바보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뭐라고 더 따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저절로 힘이 쭉 빠져버려, 그냥 됐다고 대답했다. 그와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다.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말을 섞어보니 꿈에서 막 깼을 때처럼 두통이 다시 심해진 듯한 느낌이다. 연기처럼 눈 앞을 가리는 데자뷰 때문에 주먹을 꽉 쥐고 정신을 차리느라, 마에다의 손바닥에는 손톱자국이 깊게 패여 있었다.

 

쓸데없는 걸로 시간 뺏어서 미안. 갈게. 마에다는 풀죽은 목소리로 말하며 문쪽으로 다가섰다. 문고리를 잡으려는데 어느새 다가온 그가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문고리를 대신 잡는다. 놀랄 틈도 없이 그의 향기가 훅 끼친다. 어렴풋이만 기억하고 있던 냄새가 전율이 돋을 정도로 강하게 떠올랐다. 전기가 오르듯 빠르게 스쳐 지나간 흰 장갑의 촉감. 이 촉감도 알고 있다. 순간 다리가 풀릴 뻔 했지만 마에다는 가까스로 버텼다.

 

"뭐, 뭐야, 갑자기……."

"이럴 수가…마에다 군, 저랑 단둘이 얘기하는 게 처음인 건 알아요?" 

"……그런데?"

"고작 하는 얘기가 꿈 얘기라니. 위험한 사람이랍시고 이제껏 아는 체도 안 했으면서 그런 사람 방에 쳐들어와가지고 하는 말이……. 저는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생각했거든요."

 

반대쪽 손이 마에다의 목덜미를 느리게 훑는다. 그 손길은 왜인지 화가 나 있었다. 곧바로 손톱을 세워 목덜미를 깊숙히 파고들 것 같은 위협적인 몸짓이다. 그대로 얼어붙은 마에다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자 그는 꿈 속에서처럼 어깨를 둥글게 감싸며 으르렁거리듯 속삭였다.

 

 

"다음부터는 조심 좀 하세요.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 가만히 있는 겁니다. 알겠죠?" 

"……."

"제가 여기서 무슨 짓 할지 모르잖아요. 그렇게 물러터지게 행동했다가는 쥐도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어요." 

"……."

"뭐, 걱정해주는 겁니다. 아무리 목적이 살육인 수학여행이라도 맥없이 죽어버리면 좀 곤란하거든요."

"……."

"여기서 제가 마에다 군을 푹- 찔렀으면 그냥 그대로 끝이잖아요? 시체를 발견 못하면 재판도 못 열어요. 재미없는 사람이 재미없게 죽는다. 마에다 군의 최후가 이건 아닐거라고 믿고 있을게요."

 

데자뷰가 연속적으로 피어오른다. 마에다는 저절로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머릿속을 날카로운 쇠붙이로 헤집는 것처럼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저절로 벌어진 입에서는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런 일 같은거 불가능하다고 발악하는 자신의 멱살을 틀어쥐고 지금 이게 장난으로 보이냐고 다그치던 목소리, 길어진 앞머리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눈이 부셔서 눈살을 절로 찌푸리게 될정도로 엄청난 빛의 덩어리, 눈앞까지 다가온 불길에 닿아 타들어간 머리카락에서 나는 냄새, 그를 밀쳐내려고 손을 함부로 뻗었다가 불길에 스치는 바람에 온통 시뻘겋게 물집이 잡힌 손등,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로 거세게 조여오던 불안감,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공포스럽지만 결국엔 그 후들거리는 다리로 향하게 되는 그의 앞, 차가운 눈길이지만 그 눈길이라도 주는 게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핀에 꽂혀 박제된 나비마냥 처절하게 퍼덕거리던 때. 

그가 문을 열어주었지만 마에다는 격렬한 두통에 잽싸게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 잔뜩 당황한 그가 얼른 문을 다시 닫고 자신을 급하게 받쳐드는 게 느껴진다. 흐트러진 목소리가 제 이름을 연달아 부른다. 안아드는 팔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느껴져서 마에다는 의식이 멀어져가는 와중에도 희미하게 웃었다. 답지 않게 동요하는 그의 모습이 내심 좋아서. 

눈을 느릿하게 떴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며 뭐라고 소리치고 있다. 귀가 울리다 못해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몸을 제대로 가눌 틈도 없이 아슬아슬하게 휘청인다. 그런 나를 순간 억세게 받쳐드는 팔이 있다. 익숙한 냄새가 난다. 눈 앞에 있던,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마구 부서지고 뒤틀린 풍경이 순식간에 가려진다. 그 풍경이 전부 밤하늘로 가득 찬다. 나는 안심한다. 보기 싫은 것이 있을 때, 이 상황이 너무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을 때, 내게 닥친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으려 할 때,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을 보기 싫을 때, 시야를 가려주는 그가 있어서. 그의 밤하늘에 얼굴을 묻는다. 그는 태아처럼 웅크린 나를 그대로 감싸 안았다. 태양 문양의 브로치가 보란듯이 크게 달려있는 망토지만 이 속에서 절대로 아침은 밝지 않는다. 나는 불길에서 도망치려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내게 말하곤 했다. 이런거 볼 필요 없어. 그랬다. 나는 그런 걸 볼 필요가 없었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 나는 그것만 보면 된다.

 

 

*

 

 

마에다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어느새 자신은 자기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또 꿈을 꾼 것 같았는데 워낙 이전의 충격이 큰 탓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갓 인화된 사진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머릿속은 거무죽죽했다. 끄응, 하고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는데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어왔다.

 

"이제 일어나시는군요."

"……."

 

대답하려 했으나 마에다는 그를 성으로 불러야 할지,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잠깐동안 헷갈려 대답하지 못했다. 기대고 있던 등을 천천히 떼고 바로 선 그는 어쩐지 피곤한 기색이었다. 그는 마에다가 앉아 있는 침대로 가까이 다가왔고, 죄책감에 움츠러든 마에다의 어깨를 감쌌다. 마에다가 몸을 뒤로 빼며 물러나려 했지만 그의 손이 좀 더 빨랐다. 

 

"정말이지……더 말하지는 않겠지만 마에다 군은 안정이 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의사가 아니라서 함부로 진단할 수는 없지만요."

"……."

"듣고 있는 거 맞죠? 마트에는 식료품 말고 비상약도 있어요."

"……."

"그 약으로 마에다 군이 가짜 기억을 되살려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겠……."

"……그게 가짜 기억이라고?"

"……이 말에만 반응하시네요. 그럼 그 일들이 진짜로 일어났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

"아무튼, 혼자만의 일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건 그만두고 오늘은 잠을 좀 자 두세요. 찾는 사람이 있으면 아침부터 안색이 좋지 않았다고 말해 둘 테니까요."

 

그는 마에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 물러났다. 마에다는 아직도 인정하지 못한 듯한 얼굴로 그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아, 마에다 군을 방으로 옮길 때 살짝 실수해서 마에다 군의 와이셔츠 소매 끝자락이 조금 탔어요. 피곤할 때 그 부분으로 눈 비비지 않도록 하세요. 그건 100% 제 잘못이니까 사과는 해 둘게요. 미안해……미안합니다."

"……."

가만 있어. 잘못하면 화상 입는다. 그는 나를 안고 마법을 쓸 때마다 꼭 그 말을 했다. 처음에야 무서워서 버둥거렸다 치더라도 얌전하게 있는 지금까지도 하는 말이다. 실제로 예전에는 그의 불길에 놀라 빠져나가려 마구 발버둥치다가 머리카락이 타거나 옷이 그슬린 적이 있었다. 나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으나 그는 은근히 그걸 신경썼다. 내 옷에 조금이라도 그슬린 자국이 나면 그는 그걸 보고는 아이를 타이르듯이 가만히 있으랬지, 하고 나를 꾸짖곤 했다. 내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닐 때에도 나는 응, 응, 하고 그에게 재차 대답했고, 그는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물러났다. 언제는 오기가 생겨 뚱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역으로 당황한 그는 한참동안 쩔쩔매다가 결국에는 내게 사과를 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내가 숨도 쉬지 않고 얌전히 있는 걸 알았는지 그는 불에 그슬리는 일이 생기면 그게 누구의 잘못이던 상관하지 않고 사과를 하는 버릇이 생겼다. 

 

마에다는 희미하게 진동하는 불의 냄새, 화염의 냄새를 찬찬히 되새긴다. 그도 실수를 하는구나. 당황하면 이렇게 헛점을 보이는구나.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와 소리를 죽이고 웃었다. 그가 아직 방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뒤늦게 입을 가렸지만 그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얼굴로 마에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왜 웃습니까? 상태가 심각한 것 같은데요."

"어, 봤어? 그, 그냥……분위기가 어색한 것 같아서."

 

내가 피곤할 때 항상 소매로 눈을 비비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어렸을 때 자꾸 손으로 눈을 비비는 자신에게 손과 손톱에는 병균이 많아서 눈을 손으로 자꾸 비비면 안된다고 다그치던 부모님 때문에, 항상 손 대신 소매로 눈을 비볐었다. 이제 소매로 눈을 비비는 건 습관이었고, 까슬한 재질의 니트를 입고 그 소매로 눈을 비볐다가 더 따가워져 한동안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것도 습관이었다. 중학교 때도 친구가 말한 적이 있다. 마에다는 눈을 비빌 때 손을 안 쓰네. 갸우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마에다에게 '보통은 손으로 비비지 않아?' 하고 친구가 말했던 기억. 그리고 자신이 소매로 눈을 비비는 걸 보고 소매로 눈을 비비길래 우는 줄 알았다고 말하던 그의 모습.  안 운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얼버무리던 자신의 모습. 눈에 뭐가 들어갔는지 봐 주겠다던 그의 드물게 다정한 태도. 자신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눈 밑에 살포시 자리잡은 그의 엄지손가락. 그의 연황색 눈동자와 자신의 적갈색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려지지 않고 온전하게, 또 고요하게 맞부딪치던 그 순간. 눈에 뭐가 들어가서 눈을 비볐던 게 아니었음에도 아무것도 없느냐고, 애써 태연하게 했던 거짓말.

그는 마에다에게 잠을 자라고 했지만, 잠을 자면 또 그의 꿈을 꿀 것이다. 마에다는 그가 잡았던 자신의 어깨를 바라봤다. 그가 자신에게 손을 대고, 신체적으로 접촉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가 평소에 누군가와 친밀하게 접촉하는 사람이 아닌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는 나와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필요 이상의 대화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가 내게 헛점을 보이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그의 헛점이라고 불렀다. 그럴 정도로 그는 자기자신을 감추는 데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는 가만히 서 있는 나를 갑자기 와락 끌어안아 어린아이들이 인형을 껴안고 흔들듯이 흔들어대거나, 뜬금없이 넥타이를 묶어달라고 내게 넥타이를 건네곤 했다. 물론 내가 넥타이를 묶을 줄 모르는 걸 알면서 치는 장난이다. 내가 넥타이를 쥐고 어쩔 줄 몰라하면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 넥타이를 가져갔다. 그는 내가 누가 버렸는지 모를 라이터를 주워 들고 만지작대고 있으면 적어도 나한테는 필요 없겠네, 하면서 실없는 농담을 했다. 지팡이를 잠깐 들어달라고 말하면서, 심심했던 내가 그걸 가지고 노는 걸 지켜보기도 했다. 그의 망토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한번 둘러볼래? 하고 물어보기도 하고, 혹시 먹고 싶은 음식이 없느냐고 애인한테 묻는 듯한 말투로 말하기도 했다. 확실히 그는 무뎌져가고 있었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점점 벌어지는 키차이를 실감하며, 나는 그의 풀어진 태도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마에다 군은 그 영화를 본 적이 있다고 했지?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그가 말하는 영화는 그처럼 마법을 부리는 마법사가 나오는 판타지 영화일 것이다. 나름 재밌게 봤던 작품이라, 잘 읽지 않았던 책도 찾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어때, 그런 마법사를 눈 앞에서 보니까 신기하지 않아? 그는 지나치게 쾌활한 듯한 말투로 태평하게 말을 붙인다. 나는 그의 그런 살가운 행동이 익숙하지 않아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는 내 반응을 살피며, 역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안된다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곤 연습이야, 연습, 하면서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머쓱해했다. 그가 어떤 연습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왜 이렇게까지 내게 물렁한 태도를 보이는 걸까. 

 

고상해 보이고 완전한 어른 같았던 그는 내 앞에서 점점 어린아이처럼 변해갔다. 때로는 답지 않게 어리광을 피우기도 했다. 내 품에서 아이처럼 웅크려 기대 있기도 하고,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며 뜬금없이 나를 부추기기도 한다. 그도 외로웠구나. 나처럼. 많이……외롭구나. 그가 날 이렇게 만든 것에 일조한 사람인 걸 알면서도 밀어낼 수 없는 이유였다. 점차 자신이 둘러쓴 껍데기를 벗어가는 그를 보며 끝없이 자라고 한없이 커다랗던 그가 이렇게나 작았던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 말이나 해 봐. 그는 내 품속에서 웅얼거렸다. 나는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꽤 오래 전에 말라버렸을거라고 생각했던 눈물을 주륵주륵 쏟아내며 불쌍해, 불쌍해, 라고 몇번이고 말했다. 상처입은 맨몸을 몇겹의 껍데기로 감춘 그가 불쌍하다는 것인가, 그런 그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마음을 여는 내가 불쌍하다는 것인가.

 

또 기억이 떠오른다. 기억에 연결고리가 생기자 기억은 단편적인 조각에서 이어진 필름이 되었다. 피곤했던 마에다는 데자뷰가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편안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데자뷰가 일어날 때마다 꼼꼼하게 관찰하고 또 뜯어보고, 해석할 힘이 더 이상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영화를 보듯이 감상했다. 날을 세우고 경계하던 기억들을 가만히 받아들이자 그 기억들은 원래 머릿속에 있던 기억처럼 천천히, 필름처럼 감겨 들어왔다. 마치 영화 스크린 같은 기억 속의 그는 냉정하고 정없는, 제멋대로인 사람이면서도 또 사랑스럽고 애틋한 사람이었다. 

절대 다가오지 말라는 듯이 벽을 치고 있던 그가 어느정도 물러지자, 나는 조금씩 그에게 다가앉기 시작했다. 나에게 그는 한없이 겁에 떨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존재였으나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 공포심이 어느정도 사그라드는 게 느껴졌다. 그가 나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는 일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가, 이제는 그에게 먼저 다가설 수 있을 정도였다. 말을 먼저 붙여 보기도 하고, 그가 피곤하다는 듯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침대에 널브러져 있으면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가 그의 옆에 살짝 눕곤 했다. 혹시라도 그가 나와 같이 있는 걸 거부할까 조마조마했지만 지금의 그는 그런 나를 그냥 눈감아주는 것 같았다. 예전이라면 곧바로 자리를 뜨거나 잠은 자기 방에 가서 자라고 밀어냈을 것이다. 

 

나는 항상 그에게 말을 붙일 때 저기, 라던가 있잖아, 라는 말로 시작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 본 적이 없었다. 딱히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의사소통에는 별 문제가 없었기에 그럴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지만 내 가슴을 짓누르는 것ㅡ돌덩이와도 같았던 그것은 나를 꽉 짓눌러 숨을 쉬기가 불편했고, 그를 마주하면 숨이 턱 막히기까지 했다ㅡ이 점차 커져 가면서,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무거움을 제치고 그를 부르고 싶었다. 그의 성이 아닌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내가 먼저 다가서는 행동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가 이것까지 눈감아줄까. 그렇게라도 나는 우리의 관계를 확인하기를 바랐다.

 

언젠가, 그의 조직이 재현했다는 폐허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원래라면 내 옆에 붙어 있으라고 했잖아, 라고 핀잔을 주며 급하게 나를 챙기러 왔을 그가 그날따라 유독 오지 않았을 때, 혹시 그가 일부러 나를 떼어 놓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그를 찾아 돌아다녔을 때, 몇십 분을 돌아다녀도 그를 찾지 못하고 힘이 빠져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을 때, 완전히 혼자 버려진 게 아닐까 싶어서 눈물이 터져 나오려고 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미카도."

 

그러자, 나를 짓누르던 돌덩이가 산산히 부서졌다.

"누가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습니까?"

"……."

"제 이름을 부를 정도로 마에다군과 돈독한 사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말해줘. 전부 거짓말이야?"

"……뭐가요?"

"내가 꾼 꿈, 전부 없었던 일이야? 밤에 너가 내 방으로 찾아온 것도 전부 환상이야? 내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쳐버린거야?"

 

마에다는 그의 망토자락을 붙잡고 하소연했다. 이왕 민폐를 끼친 거 더 해버리자,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는 귀찮아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어지는 마에다의 말을 듣고는 점차 미소를 짓는다. 

 

 

"너가 나를 돌봐주던 것도, 너랑 오랫동안 같이 지내느라 자연스럽게 알게 된 너의 습관들도, 너의 모자, 망토, 넥타이에 대해 얽힌 기억들도, 일상적으로 주고받던 대화도, 그, 스킨십을 했던 것까지도 전부……거짓인거야?"

 

 

그는 다시 다가와 그 날처럼 마에다의 볼을 감쌌다. 장갑의 촉감은 부드러웠다. 마에다가 울상을 지으며 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댔다. 그는 더 이상은 안되겠다는 듯, 직접 그 입술을 연다. 그의 가면이 아니라 그의 입술이 말했다. 

 

"그래요. 그건 전부 거짓이고, 환상이고, 개꿈이랍니다. 그리고 마에다 군은 미쳤어요."

"……역시 그렇구나."

 

그래도 그가 확실하게 대답을 해 주니 조금 낫다. 마에다는 울상지었던 표정을 풀고 한결 가벼워진듯한 얼굴을 했다. 마에다의 달싹이는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는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면 바로 옆에 세찬 불길이 타오르는 것처럼 화염의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 냄새에 더욱 안심이 된 마에다는 긴장하느라 굳어 있던 몸에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아직 밤은 아닐테지만 불이 꺼진 방은 제법 어둡다. 스탠드 불빛 하나 없는 방은 밤처럼 새카맣고, 그의 맨 얼굴은 가면과 모자에 한껏 가려져 있고, 그가 앞으로 하는 짓을 알아볼 수 없게 자신의 눈은 감겨 있다. 최적의 환경이 아닌가. 언제나의 기억처럼. 

그건 아주 충동적인 일이었다. 아직 입술이 따스하다. 그가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갖다 댔다. 애틋한 몸짓이었다. 애정을 갈구하는 것처럼 안쓰러웠다. 그는 잔뜩 당황한 눈동자로 급하게 수습하려는 듯 물러났지만, 이번엔 내가 달려들었다. 키스를 할 줄 몰랐던 나는 그저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입술을 붙였다 뗐다 하는 게 전부였다. 가만히 받아주고 있던 그가 내 입이 숨을 쉬려고 벌어진 사이 혀를 밀어 넣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꽤 능숙하게 키스를 이어 간다. 이것 봐.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했지. 부루퉁해진 나는 그의 넥타이를 목이 졸리도록 잡아당기는 걸로 심술을 부린다. 잠깐 켁켁거리던 그가 넥타이를 벗어 던지고 괜한 심술부리지 말라며 내 볼을 꼬집었다. 그리고 다시 키스, 또 키스였다. 몇 년간 축적해 왔던, 애써 모른 척 했던 애정을 전부 쏟아내는 것 같았다. 이 때만큼은 내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도,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 뒷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겹쳐 잡아도 눈감아주었다. 그 일이 일어난 후에는 나도, 그도 암묵적으로 약속한 것처럼 서로 모른 척 했다. 딱 한 번, 내가 입술이 부르터서 뜨거운 걸 먹기가 힘들다고 할 때,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출렁이는 걸 보긴 했다. 

짧은 키스를 마친 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에다는 듣지 못했다.

 

"……내가, 곧 뭐라도 할 테니까."

 

키스가 잠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에다는 금세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그는 키스를 하느라 잠깐 벗었던 가면을 다시 쓰고, 흐트러진 망토와 모자를 정리한 뒤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살짝 벌어져있는 마에다의 입술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다가, 도둑질하다가 들킨 사람마냥 황급하게 그곳에서 벗어난다.

 

 

*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게 뭔지 아니. 그때 너에게 입을 맞춘거야. 

 

그때 안 했더라면, 너같은 평범한 애랑 저급하고 더러워서, 아무리 마음이 동해도 입 못 맞추겠다고 합리화하면서 물러났더라면.

아니, 키스는 저질러 버렸더라도 다시 너가 달려들었을 때 어딜 감히 건방지게, 라고 생각하면서 밀쳐냈더라면.

부모도, 살던 집도 잃고, 잔뜩 기대에 부풀었던 학교 입학을 앞두고 처참히 망가져서 내 품에 주어졌던 너를 철저하게 이용만 했더라면.

그래서 지독히 외롭던 네가 입을 맞추며 나를 껴안고, 나를 쓰다듬고, 만지면서 외로움을 표출하는 걸 외면하고 모른척했더라면. 

그래서 차라리 이 창피하고 부끄러운 치부를 나만의 감정으로 남겨뒀더라면.

그래서 이것을 그저 너만의 짝사랑일 뿐이라고 못박을 수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흔적을 찾아 다시 나에게 되돌아오는 너를 아무렇지 않다는 듯 되돌려보낼 수 있었을까.

 

 

*

 

 

지쳐서 정신을 놓을 정도로 울었던 적이 있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누군가에 의해 한순간에 잃어버렸던 적이 있다.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도 그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나에게 원한을 가진 것도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탁하게 흐려져 있는, 생기없는 갈색 눈동자가 움츠러든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토록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거지? 그 사람이 내게 묻는다. 나는 대답할 상황이 아니다. 대답을 기다리지 못한 그 사람은 뒤이어 말했다. ……그런가. 평범한 삶이란 이런 것인가. 그 사람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했다. 그리고 그 사람 옆에, 그가 있었다.

 

그 사람은 그에게 뒷일을 맡긴다고 했다. 그는 충직하게 대답했고, 두려움에 납작 웅크린 나를 안아들었다. 발버둥칠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나는 공포에 질려 있어서, 그에게 얌전히 안겼다. 그게 나의 마지막 기억이자, 그의 첫번째 기억이었다. 압도적인 공포와 엉망으로 이지러진 집의 모습 때문에 그의 모습이 확실하게 내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다. 기억 가득히 노이즈가 끼어 있었지만 오로지 하나 선명한 것은 그의 장갑 뿐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온전한 모습으로 내 기억에 등장하지 않았고, 마치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한 조각씩, 한 조각씩 내 기억에 끼어들어왔다. 그는 내가 기억을 재조립할 때 끼어들어 온 전혀 다른 이방인의 부속품이었다.

 

장갑 다음은 망토, 모자, 넥타이, 와이셔츠처럼 그가 둘러쓴 것들. 그의 모습을 반절 넘게 가려버리는 것들. 그가 자신의 모습을 효율적으로 감추기 위해 선택한 것들. 그를 감추면서 그를 드러내는 것들. 그것이었다. 그것은 내게 급작스럽게, 그리고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외관 다음에는 조금 더 심층적인 것들이 다가왔다. 그의 제일 강력한 신념부터 사소한 생각들까지. 말투, 버릇, 습관들. 그리고 여러 행동들. 

1200피스의 퍼즐을 끙끙대면서 힘겹게 맞추던 기억이 난다. 나는 지금 그 때처럼 퍼즐을 맞추고 있는 건가. 오랫동안 꿈과 현실 속을 헤매면서 조각을 찾고, 그 조각을 이리저리 맞춰 보면서, 퍼즐을 완성하는 걸까. 그 끝에는 대체 무엇이 있길래, 나는 이렇게 필사적인 것일까.

 

 

*

 

 

 

결국 정말 물어보고 싶었던 것은 묻지 못했다.

 

확실하게 그의 입에서 답을 듣고 싶다. 그도 나의 꿈을 꿀까. 데자뷰를 느낄까. 내 사소한 버릇이나 습관들을 전부 알고 있을까. 내가 꾸는 꿈에서 그와 했던 모든 일들을, 그도 기억하고 있을까. 그의 말대로 나의 꿈은 전부 거짓일까. 꿈 속에서의 그는 그저 환상일 뿐일까. 

꿈은 확실해져가지만 그는 잡히지 않는다. 그는 항상 뒷모습만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눈높이를 맞추고, 얼굴을 마주할 때가 드물었다. 몇 번인가 그와 접촉했을 때, 그는 항상 뒤에서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내 품에 안겨서도 얼굴을 절대로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머리를 내 가슴에 푹 파묻고 있었다. 한낮인데도 모든 불을 끄고, 어두컴컴한 곳에서만 내게 거리낌없이 접촉했다. 나는 처음엔 당황해하거나 내 의사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한 모습에 불쾌해하기도 했지만 가면 갈수록 그가 안쓰러워졌다. 그의 손길에 외로움과 고독함이 잔뜩 묻어 있는 걸 알고 나서는 싫어하는 티를 내거나 밀어낼 수가 없었다. 나 또한 그처럼 너무 외롭고 고독했으니까. 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는 그가 뒤에서 덥석 허리를 안아 올 때 그의 팔을 자연스럽게 감싸고, 내 품안에 파묻혀 있는 그의 머리를 느긋하게 쓰다듬고, 피곤해하는 그가 나를 끌어안은 채로 미동이 없을 때면 대신 방의 불을 꺼줄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그는 외로워서 견딜 수 없는 사람처럼 굴면서도 늘 그 사실을 외면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와의 접촉은 언제나 그가 원할 때만 가능했고,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해결하고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러났다. 내가 외로워서 그의 등에 달라붙으면 그는 한숨을 쉬며 어리광부리지 말라고 하거나, 내게 애정을 적선하는 것처럼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뒤 가볍게 밀어냈다. 손을 잡으려 하면 그러지 말라며 손을 쏙 빼고,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그는 내가 그에게 외로움을 표현할때마다 그러지 말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나에게 입을 맞춘 게 꿈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촉감은 확실하다. 입술의 촉감, 키스를 할 때 손을 가만 못있는 나와 달리 손의 위치를 바꾸지 않고 정중하게 키스에 임하는 그의 태도. 내게 키스가 연인끼리 하는 사소한 애정 확인의 의미였다면ㅡ그때 했던 키스가 우리의 외로움 때문에 의미가 약간 퇴색되었더라도ㅡ그에게 키스는 조금 더 경건하고 정교한 의미인 것 같았다. 첫 키스를 한 이후로 우리는 가끔씩 입을 몇 번 맞추곤 했는데 포옹은 아무렇게나 아무 때에 하던 그가 키스를 할 때는 신성하고 거대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마냥 진지했다. 이 이상은 절대 나가지 않겠다는 듯 입술 틈으로 혀를 밀어넣는 짓은 더이상 하지 않았고, 내 턱을 움켜잡은 뒤 정확한 각도로 코가 부딪치지 않게 입술을 포갰다. 경배하는 것 같은 그의 행동에 나는 그에게 스킨십을 하기 위해 달려드는 게 경망스럽게 느껴져서 키스에 익숙해진 뒤로는 그를 껴안거나 쓰다듬는 대신 그의 가슴팍 위에 가볍게 두 손을 얹은 채로 있게 되었다.  

 

그 키스조차도 역시 그가 먼저 할 때만 가능했다. 내가 먼저 키스하자고 다가설 배짱도, 덩치도 없었지만 그가 칼같이 선을 긋는 것도 있었다. 그가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키스를 하려 하다가도 그만 둘 때가 있었는데, 잔뜩 아쉬워하던 내가 그의 팔이라도 붙잡으면 그는 나중에 내킬 때 해줄 테니까 손 떼라며 차갑게 나를 내쳤다. 그에게 나는 애착인형같은 걸지도 모른다. 살아 움직이지 못하는 차가운 인형 대신 뜨거운 피가 흘러서 따뜻하고 움직이기까지 하는, 살아있는 인형. 연인끼리만 하는 줄 알았던 스킨십을 그와 질릴 정도로 해댔지만 우리가 연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항상 나를 권력으로 짓눌렀기에, 동등한 위치에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와 하는 평범한 연애를 남몰래 상상해보고는 했다. 

 

미카도.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눈동자만 돌려 나를 본다. 나는 머뭇거리면서 그에게 물었다. 우리 그럼 연인 같은거야? 비웃음을 들을 각오를 하고 한 말이긴 했지만 막상 그의 헛웃음소리를 들으니 힘이 빠졌다. 위협하듯 다가온 그는 나를 벽에 몰아넣고 웃으며 물었다. 왜, 그런 거 하고싶어? 나는 그의 다정한 말에도 꼼짝도 하지 못한 채로 구석에 몰린 채 굳어 있었다. 그럼 나랑 사귈까? 뭐, 사귀어서 데이트도 하고, 서로 애칭도 짓고, 집도 데려다주고, 친구들한테 얘 내 애인이야, 라고 자랑하기도 하고, 그런 거 말하는 거지? 할래? 나랑. 장소가 달랐더라면 그의 말이 진짜 고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말에는 명백히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태평하게 연애나 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거였다. 내가 고개를 젓자 그는 그럼 그래야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는 말했다. 멍청한 짓도 적당히 해.  

만약 그와 내가 그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면 우리는 아예 만날 수조차 없었을까.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살아갔을까. 마치 궤도가 너무 심하게 엇갈려서 몇 억 킬로미터를 달려도 만날 수 없는 항성들처럼, 우리는 접점이 없었을까. 나는 그를 어떻게 부르는지도, 그의 습관도, 그의 외관도, 그의 옷차림도, 그의 목소리와 말투도, 그와 만들었던 모든 추억들도 전부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

 

 

나는 '만나선 안될 사람이 만났다', 라는 말의 뜻을 어렴풋이 실감한다.

 

 

*

 

 

몇번이고 기억을 지웠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삶을 살았다. 지쳐서 멈춰서려 할 때면 그가 억세게 잡아끌었다. 그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그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나는 그에게 무작정 이끌려 갔다. 그는 내가 내 맘대로 하는 걸 싫어했다. 그의 시야 안에서, 그의 품 안에서만 얌전히, 안전하게 있길 원했다.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건, 내가 그에게 저항할 수 없다는 걸 나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거였다. 

 

조금만 더 견디면 돼. 곧 모든 게 끝날 테니까. 이번이 마지막이야. 무리하는 바람에 열이 펄펄 끓어 침대에 축 늘어져 있는 나에게 그는 그렇게 말해주었다. 목이 잠겨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몸이 아프니 심적으로도 괴롭고,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졌던 것이다. 이전에는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갔을 일들이 지금은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예민해진 나는 그에게 종종 신경질을 부리곤 했는데 그는 내가 자기한테 신경질을 부린다는 것에 당황하면서도 아프니까 봐주는 거라며 능숙하게 넘어갔다. 하지만 언제나 애가 달아 그와의 스킨십을 거부하지 않던 내가 처음으로 그의 키스를 거부하고 고개를 돌리자 그는 이제껏 한번도 보지 못한 표정을 했는데, 지금 와서도 그게 무슨 표정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아마 상처받은 표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곧바로 그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상처입었다는 사실을 재빨리 지워내버리고는 내 방을 나갔다. 

 

그 이후로 그가 내게 접촉한 적은 없었다. 몸이 살짝 닿거나 눈이 마주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으나 이전처럼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하거나 입을 맞추지 않았다.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다. 죽을 것만 같은 침묵 속에서, 나는 그 날이 점점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가 모든 걸 바친 계획, 나를 이용한 계획, 또 수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어나갈 계획이 시작되는 날이. 또 기억을 지울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설령 그것이 거짓이었더라도 나는 그가 주는 애정이 끊겨버렸다는 것보다 곧 그를 잊게 된다는 게 더 슬펐다. 나는 그를 처음 봤다고 생각하겠지. 나와 어울릴 수 없는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그가 말했었다. 너, 기억을 지우고 날 만나면 날 싫어하게 될걸. 난 그런 역할이니까. 거의 확신하는 듯한 그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게 죽어도 싫었다. 어쩐지 마음이 가라앉은 듯한 그의 모습에 나는 심장이 끝없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바로 전날, 그는 말이 없었고 나 또한 말이 없었다. 평소처럼 생활하고 있지만 그도, 나도 확실히 지친 게 느껴진다. 내가 여기서 싫다고 발악하면 그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하지만 나는 그가 힘들어하는 게 싫었으므로 그러지 않았다. 대신 일찍 자려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가 금방이라도 나를 밀쳐낼 험악한 기세로 노려봤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키스하게 해줘. 그는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티를 내며 대충 내 입술에 그의 입술을 갖다대곤 돌아누워 버렸다. 부딪친 코가 화끈거린다. 이렇게 성의없는 키스라니. 나도 그처럼 짜증을 낸다. 너가 하는 거 말고, 내가 하게 해달라고. 내 말이 건방지게 들렸는지 그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지만, 내가 불도 꺼주지 않고 꿋꿋이 기다리자 한숨을 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래, 맘대로 해라.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인데. 양반다리를 한 채로 어디 와보라는 듯 기다리는 그에게, 나는 천천히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고개를 살짝 꺾어 입술을 포갰다. 입술이 맞닿았는데도 그가 눈을 감지 않아서 나는 눈 좀 감아, 라면서 또 짜증을 낸다. 그 역시 짜증이 났는지 눈썹이 움직거렸지만 곧 눈을 감았다.

 

그가 허락해 준 건 단 한번의 키스였겠지만 나는 일부러 모르는 척 몇번이고 가볍게 키스를 했다. 숨이 차오를 때면 잠깐 떼었다가 다시 키스하고, 그가 싫어할까 봐 별다른 접촉은 하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혹시 앉아서 자는 게 아닐까 싶어 입술을 더 맞대지 않자, 그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내게 더 안 해? 라고 물었다. 원하는 게 딱 이 정도였나. 오늘이 마지막이라 더 애가 탈 줄 알았더니. 도발하는 듯한 그의 말에 나는 씩씩거리며 다시 달려들었다.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확실히, 비웃는 건 아니었다. 덩달아 웃은 나는 끈기있게 기다려주는 그에게 연신 키스 세례를 퍼부으며 또 참을 수 없는 슬픔에 눈물을 흘렸다. 멋대로 흐른 눈물이 입술에 스며들어 짠 맛이 났다. 그는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고, 그저 나를 기다릴 뿐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가 이렇게 오랫동안 나를 기다려 준 적은 그 때가 처음이다.

그러다 정신없이 잠들었던 것 같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 더이상 키스를 지속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나를 눕히고 불을 끈 뒤 나란히 누웠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손을 잡아주지 않겠느냐고 물었으나 그가 허락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듯, 안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울음을 그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숨을 쉬는 게 가파르다. 우리는 일찍 잠자리에 든 보람이 없이, 아주 긴 시간동안 깨어 있었다. 얼어버린 듯한 침묵 속에서 우리의 가냘픈 숨소리와 내가 훌쩍이는 소리만 간간히 방 안에 울렸다. 검푸른 어둠으로 덮인 방 안은 아주 깊은 심해 속 같았다. 이대로, 이 추억을 간직한 채로 영원히 잠들어버리고 싶다. 이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는 마지막인데도 평소처럼 덤덤했다. 마지막에 붙잡고 늘어지는 게 구질구질하다는 걸 우리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인지 서로 침묵을 지켰고, 언제나와 똑같이 식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가 모자와 망토, 장갑까지 전부 갖춰 입은 모습을 보니 정말로 무언가 시작되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 든다. 가면은 쓰지 않느냐는 나의 말에 그는 답답해서 나중에 쓸 거라고 둘러댔다. 나 또한 중학교 때의 교복이 답답하기 짝이 없었는데 비록 몸이 자라지 않았더라도, 중학교를 다닐 나이를 훌쩍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교복을 입는 건 나한테 정신적으로 답답한 일이었다. 내겐 나쁜 기억이 얽힌 교복이라 입기가 꺼려지는 것도 있었다. 그는 나의 옷매무새를 잘 다듬어준 뒤, 그동안 고생 많았다는 식상한 말을 던졌다. 앞으로도 할거잖아. 내 말에 그가 쾌활하게 웃는다. 그렇지, 눈치는 빠르네. 

끝이구나.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든 끝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처럼 지금의 우리를 과거의 기억들 틈에 밀어넣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내게는 그 과거를 기억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여기서의 일들은 내게 있어서 전부, 일어나지도 않았던 꿈과 같은 일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이상한 기계장치를 머리에 쓰면서, 진심으로 소망했다. 이 모든 것을 간직하고 싶다고.

 

 

*

 

 

내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아직도 나의 방에 있었다. 

 

 

"깜짝 놀랐잖아. 너 계속 여기 있었어?"

"그럴 리가요. 모습을 너무 안 비췄다가는 의심받을 수도 있어서 식사 시간에는 꼬박꼬박 참여했습니다."

"안좋은 취급 받으면서도 빠지지는 않네."

"지금 너무 벽을 쳐 두면 나중에 힘들어질지도 몰라서요. 그나저나 꽤 편한 얼굴을 하고 계시는군요."

"응. 완벽하게는 아니지만……웬만한 건 전부 기억났거든."

"그거 참 안타까운 일이네요."

 

왜냐고 묻는 듯한 나의 얼굴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그야 어차피 다 잊을거잖아요."

 

나는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절망한다. 그는 어둠 속을 헤매다 겨우 빛을 찾은 나를, 다시 어둠 속으로 떨어뜨리려 하는구나. 그를 완전히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가 신경쓰고 통제해야 할 변수가 더 늘어난다. 안그래도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이 곳에서는 그런 나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크게 골치가 아파질 것이다. 계획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강한 욕망이 있는 만큼, 그는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될 일을 미리 제거해야만 했다.

 

"기억을 다시……지우는 거야?"

"마에다 군."

"그렇게 부르지 마."

"대체 이제 와서 왜 그러는거에요?"

"그런 같잖은 존댓말도 집어치워. 원래 그렇게 말 안했잖아. 왜 너 혼자만 모르는 척 하는건데?"

 

나는 손에 얼굴을 묻고 울음이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불평하듯 중얼거렸다. 그는 마른 세수를 한다. 가까이 다가와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 만났을 땐 또래의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던 그가 지금은 완전히 자란 성인 남자 같다. 늘 그랬다. 어린아이처럼 굴다가도 그 허물없는 모습에 다가서려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간격을 벌렸다. 그런 그에 비해 나는 그저 젖비린내 나는 아이일 뿐이다. 그 차이를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다가올 때는 멋대로 다가와서 달라붙어놓고, 붙잡으려 하면 마치 자신과 어울릴 수 없다는 것처럼 멀찍하게 물러나는 게 싫었다. 

 

"……이러자고 널 그 기계에 밀어넣은 게 아니야."

"너도 그러면 날 찾아오지 말았어야지. 다 안다고. 몰래 내 방에 찾아왔던 거."

"보고 싶어서 그랬어."

"……."

"알아. 짓궂은 장난도 좀 쳤지."

"……."

"네 기억을 지우는 게 실패했다는 것쯤은 그 전부터 알고 있었어."

"……."

"전부 봤거든. 매일 밤 잠을 설치면서 앓는 것도,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어쩔 줄 몰라하는 것도, 주변 사람들한테 꿈 얘기를 은근슬쩍 흘리는 것도."

내가 어떻게? 라고 물어보는 듯한 얼굴을 하자 그는 짧은 한숨을 쉬고는 덧붙여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내가 너를 감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혹시라도 네가 죽으면 안되니까 밤낮으로 감시하고 있었지."

"……."

"네 기억을 지울 때 살짝 느낌이 안 좋긴 했지만 진짜로 이렇게 될 줄이야.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대체 어떻게……."

"……."

"뭐, 됐어. 다시 시작하자. 아직 안 늦었어."

 "……."

"마에다 군, 듣고 있어?"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그러는 너는? 너도 날 그냥 '너'라고 부르지 않았으면서."

"……미카도."

 

황제. 그의 이름은 황제와 같은 발음이다. 그는 이름을 불러주는 쪽을 더 좋아했다. 이것이 그의 진짜 이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이름을 불러줄 때면 그의 눈동자가 권력욕과 야망으로 가득차 빛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가 내가 먼저 하는 모든 접촉은 차단하고 밀어냈으면서도 이름을 부르는 것은 기꺼이 허락해준 걸까. 나는 그가 나를 밀어낼 때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남몰래 외로움을 해소하곤 했다.

 

"유우키. 그냥 모르는 척 해."

"어떻게 그래. 모든 게 확실해졌는데."

"나도 그냥 모르는 척 했잖아. 너가 날 싫어하고 피하는 걸 보면서도."

"난 못해."

"내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게 해줘."

"……."

"더는 안돼.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

"……."

"그러니까 전부 잊어."

"……."

"아무 대꾸도 하지 말고,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제발."

"……그럼 하나만 물을게."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와 나의 시선이 겹쳐진다. 

너도 그랬을까. 그 사람을 보지 않아도 그 사람의 모습이 아른거렸을까. 사소한 행동을 하다가도 문득 그 사람이 생각났을까. 가끔씩 평범한 일상을 보낼 때면 이 일상을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다정하게, 연인처럼 아주 다정하고 애틋하게 접촉하고 싶어했을까. 스킨십을 할 때면 심장이 크게 두근거리다 못해 온 혈관이 쿵쾅거리는 걸 느꼈을까. 그 사람이 나를 바라보지 않는 것보다 내가 그 사람을 바라보지 못하는 게 더 안타깝다고 생각했을까. 그 사람의 생각으로 밤을 지새웠을까. 좋아하면서도 그 마음에 덜컥 겁이 났을까. 약속하고 싶었을까. 그 어떤 것이든 소중한 걸 선물하고 싶었을까. 같이 잠들고 같이 깨어나고 싶었을까. 같은 미래를 바라보고 싶었을까. 그 사람의 과거가 어쨌던 간에 끌어안아 주고 싶었을까. 보고 싶었을까. 좋아했을까. 사랑했을까. 물어보고 싶은 것은 너무 많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수많은 감정들을 한데 끌어모은다. 한 문장으로 일축한다.

 

"……너도, 내 꿈을 꾼 적이 있어?"

 

그는 웃지 않는다. 슬퍼하지도 않는다.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원망하는 듯한, 기뻐하는 듯한, 섭섭해하는 듯한, 상처받은 듯한, 그리운 듯한, 애틋한 듯한, 너무 많은 감정이 뒤섞여서 어떤 것이라고 정리할 수 없는 표정. 질문하는 나와 똑같은 표정.

 

"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쭉."

 

그 대답을 들은 나는 눈을 감았다. 그가 하는 게 무엇이던지,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다. 이 뒤로부터는 온전히 그의 몫이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

 

 

어떠한 자극을 가해도, 원형을 찾는다. 원래의 형태를 되찾는다. 그것이 나의 기억이었다.

이제까지 몇 년이 지나서, 수많은 시간이 지나서, 그리고 또 어떤 외부 자극을 통해 기억을 지워 버렸더라도, 가짜 기억을 주입했더라도, 내 기억은 기어코 올바른 형태를 찾아간다. 정확히는 그를 찾아가는 거였다. 복잡하게 얽힌 미로 속에서 출구에 있는 건 그다. 출구까지 가는 길은 여러 갈래더라도 결국에 만나게 되는 건 그였고, 나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빵조각을 따라가는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흔적을 되짚어 그를 쫓아간다. 언제나 등밖에 보여주지 않는 그에게 닿기 위해, 그의 휘날리는 망토자락이라도 붙잡기 위해 그를 바쁘게 좇았다. 

 

끔찍한 기억이었지만 그것을 굳이 지워버리고 싶지는 않다. 모른척 하고싶지 않았다. 그를 모른척하고 지워내면 내가 지는 것 같았다. 끔찍한 기억을 모조리 지워내면 그도 말끔하게 지워질 터였다. 하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참 무르게도, 나는 그의 존재가 내게 큰 흉터로 남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그를 내 기억에서 밀어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흉터가 너무 깊고 깊어서 나을 수 없을 정도로 썩어버렸다면 어쩔 수 없이 안고 살아가야 하지 않은가. 17살의 봄, 그 이후로 끊긴 나의 삶을 초라하게라도 지속시켜주던 게 바로 그였던 것이다.  

 

천운이 있으면 뭐든지 가능한거지. 이른바, '신' 인거네.

그런 셈이지.

그때 내가 평범한 일상을 지내고 싶다고 빌면……그것도 가능할까?

……아마도. 

…….

그걸 네가 바랄 수 있다면 말이야. 

 

천운을 쓸 수 있게 될 때쯤이면 내 존재는 지워져있을 것이다. 나는 천운을 가진 그 사람의 그릇일 뿐, 내가 천운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러면 나는 사라져버린다.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 그와 지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도……사라진다. 나는 그걸 원치 않았다. 만약 나의 존재가 전부 지워지고 그 사람의 인격이 온전히 들어앉았더라도 아주 조금, 단 1%라도 나의 의지가 남아 있다면, 바라고 싶었다. 평범한 일상을. 모두가 행복한 일상을. 평화롭고 안정적인 일상을. 그와의 일상을. 

필사적으로 발버둥친다. 아마 그것은 무의식 중의 발악일 것이다. 모든것이 끊어지고 암흑 뿐인 나의 세계에서, 단 하나 떠오른 태양. 그것이 설령 절망 그 자체라 할지라도, 내 곁에 그가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태양이 존재한다는 사실처럼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법칙이었다.

 

구원?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엉망진창으로 망가져버린 나를 어떻게든 살아가게 해주었으니 구원인 셈 쳐도 되지 않을까. 

 

나는 선택해야했다. 그의 오랜 염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황제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그의 행복을 위해 나의 존재를 이 세계에서 지워버릴 것인지, 혹은 내 안의 그가 소중해서, 진정한 나로서 그의 옆에 있고 싶어서,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나의 행복이 더 중요해서,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엇나가버릴 것인지. 

 

 

 

 

 

 

 

 

case 1.

 

 

대체 무슨 일인지,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 괜찮냐고 끊임없이 걱정을 해 온다. 미츠메 말로는 내가 거의 사흘 동안이나 깨어나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나. 엄청나게 심각한 일이지만 정작 내 몸은 멀쩡했다. 살짝 두통이 있는 것 빼고는 몸도 가뿐하다. 마치 바다에서 수영을 하려다가 뚝 끊긴 기억처럼 일어나기 전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래도 기억이 완전히 지워진 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소라가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애들 이름과 재능을 하나씩 기억해보라고 했을 때, 다행히도 나는 전부 기억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생각과 다른 학교 생활을 보내게 되면서 이래저래 실망하고 충격을 받긴 했지만 그 정도라니. 누구한테 살해라도 당한 줄 알고 나를 찾아 다녔다는 소라의 말에 나는 그저 개인실에서 잠을 잔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혹시 미끄러져서 머리라도 박고 기절했나, 싶었지만 일어난 것은 침대 위였으니 그것도 아닐 것이다. 딱히 누가 찾아오지도 않았다. 몽유병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요? 나는 고개를 젓는다. 어렸을 때부터 특별한 잠버릇 없이 잘 자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이 찝찝한 기분은 대체 뭘까.

 

"그 때 분위기도 장난 아니었거든! 카나데, 너도 알지? 서로 의심하고, 심각한 상상도 하고, 진짜 난리도 아니었어."

"마, 맞아요……다들 시체라도 찾아야 재판을 연다면서 혹시 누가 방에 숨겨둔 거 아닐까 개인실도 뒤져보고 그랬거든요……."

 

히비키와 카나데의 말에 나는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내가 잠을 자고 있을 때 그렇게나 심각한 일이 되어 있었다니. 불가능한 일이 아니기에 다들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자는 사이에 살해라도 당했다면……그 뒤는 생각하기도 싫다. 개인실이 알아서 잠그는 문이 아니라 지문을 입력해야 하는 학생수첩으로 열어야 하는 문이라서 천만다행이다. 그건 그렇고 내가 없는 사이에 뭐라도 발견한 게 있느냐, 탈출할 단서는 찾았느냐고 묻자 히비키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 모습만 보고 알아챘다. 여전히 진전이 없구나. 순식간에 입을 다무는 히비키 대신 소라가 입을 열었다.

 

"사실 마에다 씨가 잠들기 전이랑 별반 다를 게 없어요."

"그……실망시켜드려서 죄송해요, 마에다 씨. 언니랑 밤낮으로 섬을 뒤졌는데도 찾을 수가 없어서……."

"아니야. 나도 그 때 잠들어있느라 조사하지 못했는걸. 앞으로라도 열심히 하면 되지."

"……그렇네요! 자, 언니, 그렇게 풀죽어 있지 말고 조금만 더 찾아보자. 우리 아직 게스트하우스 쪽은 제대로 안 봤잖아?"

"누, 누가 풀죽어 있다고 그래? 너, 나랑 같이 다녀서 겨우 조사한 주제에 너가 다 한 것처럼 잘난척하지 말라고! 그럼 소라, 마에다, 우린 갈게."

 

여느 때처럼 투닥거리면서도 함께 꼭 붙어다니는 둘의 모습에, 언제나와 같은 일상 같아서 안심이 됐다. 지금은 절망스러운 상황이라도 나중에는 이것보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괜스레 기대를 해 보다가 우리도 놀 수만은 없다는 소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조사를 하러 자리를 떴다.

 

*

 

 

한참을 돌아다녔으나 역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여기서 뭘 찾기를 기대한 게 잘못이었을까. 나는 어느새 노을이 져 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혹시 지나가는 배라도 없나 바닷가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이곳에 진짜로 수학여행을 온 거였다면 좋았을텐데. 경치도 좋고, 날씨도 좋은 곳인데 갇혀 있다는 생각을 하니 이 좋은 섬이 감옥마냥 답답해졌다. 슬슬 모노크루즈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뒤를 돌자, 이제까진 아무도 없던 바닷가에 누군가가 내 바로 뒤까지 와 있었다. 

 

"으왓, 깜짝이야!"

 

 

놀라서 모래사장에 엉덩방아를 찧은 나에게, 흰 장갑을 낀 손이 내밀어진다. 

 

"아, 실수. 놀래킬 생각은 아니었어요."

 

산노지 미카도. 초고교급의 마법사이자 이 모든 일의 흑막이었다.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할 마법을 사용하며 눈앞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데다 함께 어울릴만한 좋은 성격도 아니라서 꺼려지는 사람이다. 그 손을 덥석 잡기가 머쓱해 나는 혼자 일어날 수 있다며 산노지의 손을 뿌리쳤다. 산노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거두어들이며 내게 묻는다.

 

"마에다 군, 이제 괜찮나요?"

"……뭐가?"

"사흘이나 깨어나지 못했다고 들었는데요."

"그, 그건 어떻게 들었어? ……아무튼, 괜찮아. 딱히 아픈 곳도 없고, 멀쩡한걸."

"그럼 다행이군요."

"그거 물어보려고 온 거야?"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으, 응, 아냐……난 그럼 가 볼게."

 

나는 그를 뒤로하고 빠른걸음으로 떠났다. 산노지와 같이 있으면 무슨 짓을 당할까 불안하기도 하고 오싹해서 더는 같이 있고 싶지 않다. 산노지는 평소에 잘 눈에 안 띄는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나를 찾아오다니 무슨 꿍꿍이인걸까. 정말로 나를 걱정해서 물어봐주는 건가? 그게 진심이라면 산노지는 원래부터 심성이 글러먹은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도 사실 산노지가 흑막이라서 멀리하는거지 흑막이 아니었다면 모두와 평범하게 친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괜스레 생각이 많아진다. 이런 날에는 이상한 꿈도 잘 꿨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이곳에 와서 몇 번이고 이상한 꿈으로 잠을 설쳤던 것 같다. 깨어나지 못했던 사흘 동안도 아주 긴 꿈을 꿨던 것 같은데……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뒤숭숭한 꿈을 꾸면 왠지 그 날은 하루종일 기분이 좋지 않으니 오늘은 좀 일찍 자 볼까. 내일부터는 아침 식사에 제대로 참여해야겠다. 

한참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자, 산노지는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채였다. 어쩐지, 그 모습이 쓸쓸해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나는 그런 산노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모노크루즈 안으로 들어왔다. 

 

 

 

 

 

 

 

 

 

case 2.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다급하게 베개 속에 숨겨둔 수첩을 끄집어냈다. 다행히 그가 이것까지 건드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제까지 썼던 모든 글들을 쭉 읽으며 내 기억이 제대로 남아 있는지 확인한다. 그 장치를 사용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선명한 기억들. 이건 정말로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그 장치를 쓴 이상 나의 기억은 온전히 남아있기는 커녕 싸그리 없어지기나 안 하면 다행이었다. 특히 기억이 남아있더라도 뇌에 큰 충격을 가하기 때문에 신체적인 문제가 동반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오히려 나는 그의 꿈을 꿀 때보다 더욱 건강하다.

 

내가 사흘이나 깨어나지 않았다며 주변에서 걱정해왔지만 대충 둘러대며 넘겼다. 이전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고,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조금 잤더니 그렇게 된 것 같다고 얼버무린다. 모두들 내가 살해당한 줄 알았단다. 뭐, 어떻게 보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모든 걸 알게 된 '진짜 나'가 그에게 살해당할 뻔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의 야망만큼이나 간절한 염원을 통해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이젠 보란듯이 그를 골려 줄 일만 남았다. 

 

조금 더 쉬어야겠다며 걱정하는 애들을 밀어내고 방에 들어왔다. 대놓고 그를 찾아가면 단박에 들킬 테니, 시간을 두고 그의 방을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때까지는 방에서 혼자 있기로 한 것이다. 아직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말로 나의 소망이 이루어졌다니. 심지어 기억은 이전보다 더 또렷해졌다. 엉망진창으로 맞춰서 무엇인지도 몰랐던 퍼즐의 그림이 이제야 제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내가 원하는 대로 당황한 모습을 보여줄까.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까 봐 안절부절 못하고, 그 계획을 틀어버린 장본인인 내게 불같이 화를 낼까. 어느 쪽이던 좋았다.

 

*

주변을 꼼꼼하게 확인한 나는, 그의 방문을 조심스레 두들겼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연다. 온갖 장신구를 둘러쓰고 철저하게 속내를 감춘 그지만, 내 눈에는 확실히 옛날의 그로 보인다. 그가 나를 보고 입을 열 틈도 없이 방 안으로 밀어넣고, 내친 김에 끝까지 몰아 간다. 어라라, 잠깐만. 크게 당황하면서도 그는 기꺼이 뒷걸음질을 쳐 주었다. 예상대로 당황한 그는 내 입술이 무엇이라도 말하기를, 설명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예전에 내 품에 안겨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부추겼듯이. 미카도. 그의 바람대로 내 입술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웃음을 애써 참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저 물러나기만 했던 그가 갑작스럽게 내 팔을 휘어잡아 끌어당겼고, 나 또한 그에게 기꺼이 이끌려갔다. 

이것도……천운이라는 건가. 그가 나직하게 내뱉은 말은 급하게 달려든 입술에 밀려 사라져버렸다. 이제껏 느꼈던 모든 서운함을 풀듯 그가 싫어하는 경박한 키스를 실컷 했다. 너, 되게 귀엽게 군다. 입술을 뗀 그는 샐쭉 웃으며 내 볼을 꾹 눌렀다. 그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뒤를 잇는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그의 물음에, 나는 그와 똑같은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대답했다. 뭘 어째, 모른 척 해야지.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건 그뿐만 아니라 나의 특기이기도 했다. 그 역시 잘 알고 있으니 내게 더이상 무언가를 묻는 일은 없을 것이다. 숨 고를 틈도 없이 다시 다급하게 입술이 맞부딪쳤다. 나는 그와 입술을 맞대고 같은 숨결을 나누면서, 내가 그의 바람대로 모든 걸 전부 잊었더라면 이걸 첫키스라고 생각했을까, 하는 심심한 생각을 한다. 어느 쪽이던 그와 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럼 상관없지. 

 

나는 바랐다.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삶을 살던 내게 단 하나, 강렬하게 지펴진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그의 손을 뿌리칠 것이다. 그가 가자는 곳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의 손을 내가 먼저 잡고, 내가 가자는 곳으로 그를 이끌 것이다. 그와 쭉 함께 있고 싶다. 그 욕망을 위해서 나는 처음으로 그의 망토 밖으로 뛰쳐나갈 것이고, 불길을 꿰뚫고 나갈 것이다. 미적지근한 내 안에서 뜨거운 화염이 요동치는 게 느껴진다. 화염의 냄새가 내 안에서도 진동하는 게 느껴진다. 언제나 멋대로 하는 그가 괘씸했다. 그래서 심술을 좀 부리고 싶었다. 그에게 나를 알아달라고, 우츠로가 아닌 마에다 유우키를 알아달라고 호소하고 싶었다. 

"너 만약에, 그게 전부 네 착각이면 어쩔래?"

 

그는 짓궂은 말로 나를 놀린다. 나는 한 두번 그에게 당해본 게 아니기에 꽤 능숙하게 넘어갈 수 있다.

 

 

"나는 최초로 가짜 기억에 의해서 사랑에 빠진 사람이 되겠지. 아마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좋은 소재잖아."

 

아마 이곳에 온 뒤 처음으로 같이 웃었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나조차도 어쩔 수 없겠다며, 앞으로 더 골치가 아파질 것 같다고 그가 투덜거렸다. 걱정 마. 다 잘 되겠지. 그를 안심시키며 그의 어깨를 쓰다듬는다. 그와 내가 함께 있는 이상, 내게 있어서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다. 

 

 

내가 어떤 짓을 저질러도 용서하고 받아들여 줄 단 한 사람. 나는 그에게 이래도 용서해 줄래? 라고 물었다. 그는 기꺼이, 라고 대답한다. 

 

 

모든 조각이 제 자리를 되찾았다. 완벽한 형상이 되어, 기억을 완성시켰다. 그 형상은 태양이자 그의 모습이었다. 나는 애초에 내가 갖고 있던 조각이 나의 조각이 아니라 전부 그의 조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갖고 있었던 건 전부 당신이었어. 나의 조각은 전부 당신이었고, 그 조각은 전부 내 안에 있었다. 그가 내 안에 존재하듯이. 모든 조각이 원상태로 돌아가자마자 내 안의 휘몰아치던 불안과 혼란함은 죽은 듯이 가라앉는다. 단 하나 떠오른 것은 절망의 태양, 그것 뿐이다.

2017/09/01

bottom of page